수림아트랩 재창작지원 2023

Critic : 성혜인
_잔향의 좌표들

전시 개요
수림아트랩 재창작지원 2023 : 평론
<동심원 Ⅱ - '원'>

글: 성혜인

  • 내용



    어떤 공연은 끝이 나고서야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위해 끝난다.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더 넓은 세계로 발걸음하는 모험담의 주인공처럼 어떤 음악가는 더 먼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매듭짓는다. 유병욱은 ‘전통’으로부터 자신의 반경을 넓혀왔던 음악가다. 꽹과리, 장구, 징, 카혼, 핸드팬 등 몸으로 익혀왔던 수많은 타악기의 소리는 전통에서 멀어지기 위한 것도, 낯선 청각적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의 연주는 정확히 자신을 향한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멀리까지 갔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더 먼 곳으로 떠나기 위해 잠시 정박한다. <동심원 Ⅱ - '원'>은 시작하기 위해 끝난다.

    공연의 제목인 ‘원’은 타악기와 관련된 유병욱의 사유를 두루 아우르는 표상이다. 이 공연은 정확히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관해 묻고 있다. 그렇다고 거창한 실험의 의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병욱은 내면에 집중하며 악기를 두드리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음악적 건축법은 홀로 모든 악기를 연주하며 소리를 촘촘하게 쌓아올리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숨 가쁘게 소리를 축조하는 방식은 그가 타악기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실제로 이 공연에서는 타악기의 몇몇 숨겨진 측면이 드러나는데, 우선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타악기에 대한 위상반전이다. 그의 음악은 타악기가 반주악기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이탈해 있다. 타악기로만 그려내는 음악적 풍경은 선율악기의 부재를 잊게 만든다. 물론 선율악기의 부재를 음악적 ‘결핍’으로 상정하고 타악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타악기의 한계를 전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타악기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식의 진술로 유병욱의 음악을 갈음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는 각각의 타악기가 가진 소리의 질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타악기만으로 빚어진 음악의 전형을 재조직화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타악기의 위상을 조정하는 이러한 시도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악기를 온전히 몸에 밀착시킨 유병욱은 당면한 과제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동심원 Ⅱ - '원'>에서 타악기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악기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신체의 감각, 그것을 익히기 위해 누적된 시간을 무대 위에 구체화하는 장치에 가깝다. 고도로 숙련된 신체가 전면화 될 때 과잉되는 에너지가 음악의 밀도를 높인다. 군더더기 없이 길들여진 소리 자체가 도리어 타악기를 재고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다수의 타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음악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적 감흥이 분명 존재하고, 유병욱은 이를 무대 위에 전략적으로 안착시키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타악기에서 자주 간과되어 왔던 소리의 구체적 층위를 복권하기도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소리의 미세한 높낮이, 깊이, 무게, 질감을 중요한 정보값으로 상정하고 관객들에게 식별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여음과 잔향처럼 타악기의 음향적 공간을 음악의 중심으로 옮겨놓기도 한다. 그러고는 빈 공백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시공간이 단순히 어떤 음이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정량화할 수 없는 감정의 무게라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동심원 Ⅱ - '원'>은 부차적으로 인식되지만 악기의 정체성을 규정할 정도로 핵심적인 소리들을 불러들인다.

    평소 매몰되어 잘 보이지 않았던 타악기의 면면이 드러나면서 가장 뚜렷하게 감지되는 것은 타악기의 ‘본성’이다. 이 공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두 사물이 부딪혀 울림을 만들어내는 타악기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타악기의 안팎을 자세히 그려보면서 치고, 두드리고, 흔드는 등 타격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의 중반 무렵, 이경구, 조영덕의 연주와 야스민(Yasmin)의 벨리댄스가 포개지며 공연의 호흡을 순식간에 전환하는 순간에도 ‘울림’ 혹은 ‘진동’이라는 비가시적 세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궁극적으로 이 공연은 ‘두드림’의 의미를 묻는다. 이 물음은 타악 연주자 유병욱의 정체성과 결부된 근원적 질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집요하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했던 질문이 공연을 추동한다. 유병욱은 “원을 다루고 그리는 것이 자신의 삶과 닮아 있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음악과 음악을 연결하는 휴지부에 병치된 영상에서 때론 내면의 독백으로, 때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를 빌려 공연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응축시키고 있기도 하다. 공연에서 새롭게 부상하거나 재평가되는 타악기의 면면은 유병욱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다.

    시리즈의 제목으로 명시된 ‘동심원’은 중심이 같은 모든 원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점점 더 넓어지는 원 안에 살아가며 원을 완성하는 데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릴케의 시구처럼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 확장되고 축소되며 완성되는 음악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어떤 소리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반향이 되어 돌아온다. 이 글은 그 반향에 대한 작은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