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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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간다
방파제 계단을 10단만 내려가면 바닷속이다. (...) 들리는 것은 내 숨 소리뿐.
피터 고드프리-스미스, 『메타조아: 동물의 삶과 내면의 탄생』
[... 지상에는] 변덕스러운 가벼운 공기… 만물의 형태가 되어 하늘에서 난무하는 구름… 공상에 가득찬, 만사에 현실이 결여된 세계…
아베 코보, 『제4 간빙기』
한 생명체의 삶은 일시적일지라도 이 일시성은 어딘가로 향할 뿐만 아니라 어딘가서 이쪽을 향해 온 것이기도 하다. 오고, 지나가고, 떠나 가고, 그리고 다시 오고 지나가는 반복과 연속의 과정, 그것은 마치 해변과도 같다. 해변에서 우리는 멀리서 이쪽으로 향해 오는 파도에 귀 기울여 생명의 역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인류 역사 이전의 역사로써 이곳에 밀려온다. 해변에서 (육지와 바다로) 갈라진 인류의 역사는 마이클 타우시크(Michael T. Taussig)가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본능을 억누르는 본능을 이용해서” 탄생하였다. 육지에서 사는 생물과 바다에서 사는 생물로 각각 진화하는 이 갈림길은 뚜렷이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접점이다. 말은 해변, 바꿔 말해 바닷가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육지의 변두리이다. 바다와 뭍은 이어져 있다. 그것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생명체에도 해당한다. 해양생물을 모든 생명의 시초로 보는 관점에서, 인간은 혼돈적이던 과거의 모습을 동경하기는커녕 미개함의 적으로 삼기도 한다.
오묘초의 개인전 《변형 액체》을 보는 것은 마치 해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았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2층에서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서 층별로 작품이 전개하는 과정을 본다. 발전하는, 바꿔 말해 진화(이자 퇴화)하는 과정에 주목한 전시의 출발점은 작가가 쓴 공상과학소설이다. 이 소설은 먼 미래에 대재앙을 겪은 지구에서 지상 대신 심해에 살게 된 생명체—한때 인간이라 불린—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최근 과학연구가 밝힌, 바닷달팽이에게 기억이 전이 가능하다는 실험 결과를 발판 삼아 오묘초의 개인전은 우리의 미래로 그려진다. 전시에서 우리는 육지에서 바다로 내려가듯이 작품을 본다. 2층에 전시된 조각 작업에서 자연물을 재료로 다룬 것을 알아볼 수 있다면, 1층, 지하 1층으로 내려갈수록 형태는 서서히 투명해지고 빛을 띠게 된다. 다리를 잃고, 머리도 없는 퇴화한 모습은 삶의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게 된 진화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우리의 먼 미래가 이 대상에 담겨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얼마나 우리와 가까울까?
먼 미래가 이 대상에 담겨 있다는 이 말은 우리의 현재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더불어, 작가는 지금 현재의 기술을 통해서 미래의 모습을 경작해 나간다. 유리와 스테인리스를 다룬 작업은 전시장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진화/퇴화의 전개에 따라 선예도를 높여간다. 지하 1층, 여기에 도달한 작품 존재가 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존재하는 곳에 조용하고 시간이 고요히 흐르는, 마치 심해와도 같은 공기가 흐른다. 그러나 이것/이곳은 작가의 상상과 작업 방식에 의해 에너지를 동원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유리는 깨지기 쉽고 스테인리스는 견고한데, 작가는 동일한 방식으로 재료를 다뤄 작업한다. 유리와 스테인리스를 1200도에 달하는 고온에 달구고 냉각시켜 형태를 잡는 일은 형태에 더 신경을 기울일수록—즉 전시장에서는 단계별로 내려갈수록—역설적으로 힘이 들고 손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작품은 이른바 공예적인 손맛이나 장인적인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강철과 유리의 유토피아성에 대해 언급한 지점을 경유해서 본다면, 오묘초가 이뤄낸 작품 형태는 달구어 두드리고 냉각을 통해 얻은 우리의 비전(vision), 아니 선견(prevision)의 결과이다.
달구기와 냉각으로 얻어진 선견은 작가가 설정한 대재앙의 시점(時點/視點)에 어떤 힘을 발휘할까? 로절린드 윌리엄스(Rosalind Williams)가 대재앙이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운/자연적 생활을 다시 획득하는 점을 짚듯, 오묘초의 세계관과 그곳에서 탄생한 작품은 인간 (그것 자체가 사변적인) 멸종을 배경 삼아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때 자연이란 바로 바다와 육지로 갈라지기 이전의 모습이다. 대안적 삶은 ‘인간의’ ‘생활’이 아니라 이 두 단어에 괄호를 친, 인간이 부재하는 시점(時點/視點)을/에서 전시를 통해서 그려진다. 작가가 설정한 자연적 회귀는 일부러 지어낸 거짓으로 기각되거나 인간주의적이기만 할까? 에마누엘레 코치아(Emanuele Coccia)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자연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전사(前史)일 뿐만 아니라 문화가 실현되기 전단계인 미래이다. 그가 보기에 문화와 자연 둘 다 경작되어 나온 것이다. 이 사고방식을 통해서 본다면, 《변형 액체》는 예술로 표현된 새로운 자연이 지금의 문화를 기억하고 미래로 보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라는 서사를 써 내려갈 때, 재난이나 멸종이라는 언어를 쉽게 부정과 묶고 세계를 추방했을지도 모른다. 절망적인 세계관에서 살아남은 유기체들은 그들의 의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다. 이들이 과거를 다시 보러 갈 수도 있다. 《변형 액체》로 구현된 생명체가 먼 미래에, 누군가의 기억을 이식 받은 후에 그를 찾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소설 『제4 간빙기』(1959)에는 수소 인간이 사는 미래가 등장한다. 막판에, 한 수소 인간이 육지를 찾아가는 여정이 그려진다. 그가 육지에 도달했을 때, 심한 호흡곤란을 겪는다. 중력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도착한 해변에서 그는 이전에 살던 인간이 선택해야만 했던 과거를 몸소 경험한다. 그는 아버지가 살던 곳에서, 삶과 죽음, 적응과 부적응을, 그리고 진화와 퇴화의 갈림길인 해변에 있었다. 전시를 보는 사람은 전시장을 다시 올라오면서 생각한다—선택한/된 것과, 그러지 않은 것, 그 끝에 도달한 곳. 오묘초가 만들어낸 미래의 생명체는 상상-작업적 달구기와 냉각을 반복한 끝에 나온, 우리 시대의 자연으로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