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최근 김희수아트센터의 전시는 건물 서쪽 입구 그라운드 1층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지희킴의 〈상처 입은〉과 서성협의 〈위상경계: 안과 밖〉(#1), 〈free-form frame〉 연작을 훑어보면서 전시를 짐작해 보았다. 원초적인 표명과 정교함과 거친 마감이 교차하는 작품들은 이 전시가 그리 단출하진 않겠단 마음 준비를 품게 만들었다. 연이어 입구에서 비슷해 보이는 두 개의 촛불색 종이 묶음을 받았다. 아니다. 처음 손에 쥔 것이 최영의 중편소설 『작은 빛』이었고 전시를 둘러보다 다시 입구로 돌아가 받은 게 전시 브로셔 《작은 빛》이었다. 시간 흘러 돌아보니 『작은 빛』의 겹낫표 『』와 《작은 빛》의 겹화살괄호 《》, 그 사이가 내가 밝힐 틈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조약돌 두 개를 쥔 듯 달그락거리며 설렘과 옅은 긴장을 품고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일별했다.
연유를 미처 헤아리기 어려울 땐 어둠에 몸을 의탁하곤 한다. 현우민의 〈잔상 여행〉은 마침 상영시간도 50분(46분 55초) 가까이여서 우선 그곳에서 공간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이 영상은 아버지-어머니-나(현우민)의 서사에 ‘남은 자리’를 덧대어가며 이어지고 있었다. ‘남은 자리’라는 표현은 특별한데, 그 이유는 기억이 수취인불명일 리 없으나 기억이 돌아올 자리는 종종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 중구 어딘가, 숙대 입구 갈월동과 청파동 어딘가, 일본 골목 어딘가 등을 비추는 카메라에 현재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스쳐 지나간다. 남은 자리를 구성하는 이는 발화자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도 포함한다. 현우민은 작가노트에서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개인의 입장과 거리감을 적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표명한다. 재일한국인 2세 부모와 자신의 이야기로 닫힌 서사가 아니라 너 또한 포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동시에 굴절지고 버려진 듯한 액자가 담긴 사진 〈잔상 여행: 공성아파트〉가 근처에 덩그러니 놓여 액자식 구성을 암시하는 모양새다. 2010년 첫 작업 〈돌-아-가〉는 그가 이 전시와 어떤 친화력이 있는지 암시한다. 떠나고 돌아왔지만 떠난 곳도 돌아온 곳도 남은 자리로 명시적이지 않은 어떤 이들에겐 공통감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단서가 더 필요했을까 다음 발길이 향한 곳이 서인혜의 〈희수의 비디오 카셋트〉다. “우리 손녀 좀 살펴주오/예술한답시고 저러고 살고 있는데 당신이 좀 도와주시오”라는 간절한 자막 삽입에 강렬하게 처지가 이입되고 말았다. 금정(金井), 일본에서 ‘가나이’로 발음되는 금정이 동교 김희수 선생의 일본 이름이었음은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우물 정(井)이 환기시키는 윤동주의 「자화상」 속 사내는 학창시절 기억 덕에 익숙하다. 그 시절 「자화상」을 되뇌이면서 밉고, 가엾고, 그리운 나의 위치에 시대를 잠시 물리고서 동감하지 않았던가. 굴렁쇠 소년, 시모노세키, 된장찌개, 칼국수, 두산베어스, 금정양품점……. 현해탄 파도는 필시 한곳으로만 쳐 대지 않는다. 한일을 오가며, 시대가 뒤섞이고, 저해상도 이미지로 군데군데 편집된 영상은 좀처럼 부르기 어려운 이름을 가깝게 만든다. “하트 시그널/희수 재림 편”이라는 자막을 보면서 미처 수림문화재단과 연동지어 생각치 못했던 구체적 이름의 실마리를 얻게 됐다. 희수와 재림의 이름으로 점멸하는 설치 작품 또한 《작은 빛》의 연원이자 그 빛이 어디서부터 기인해서 누구에게로 던져지는지 윤곽을 점점 더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어른이면서도, 어른은 늘 어려운 편인데 이제 몇 발자국 편안해짐을 느낀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윤곽이 잡힌 후 서성협의 테트라포트 형태의 작품을 보았다. 테트라포트는 바닷가 사는 이들에게는 익숙할 조형물이자 재해 안전을 위한 구조물이다. 철없을 때 뛰어놀던 놀이터이지만 철들고서는 얼마나 죽음 가까이 나를 놓는지 알게 되어 쉽사리 발 딛지 않게 된 구조물이기도 하다. 서성협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나무와 라탄으로 변형하고 스피커를 내장하여 특별한 소리를 담았다. 방파제를 따라 위아래 빼곡히 들어서서 큰 파도를 막으며 경계 짓는 테트라포트 형태로부터 뱃고동 소리처럼 굵게 둥둥대는 음향을 들을 수 있다. 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그래서 더 금기를 넘고 싶은 치기도 자라나게 만드는 미지의 일차적 구조물 너머에 세계가 자리한다. 서성협의 작가노트에는 “모든 기회가 바다 건너 육지에 있다고 믿고 있던 나”가 등장하는데, 소년은 결국 바다를 건넜고 이보다 앞서 김희수 선생이, 선생과 같은 처지였을 기회를 꿈꾸던 많은 이들이 바다를 건넜다. 혼종의 정체성은 음험하게 치부되면서도 실상 순도 백의 정체성 또한 불가능한 희망이지 않던가. 정체성은 구성의 산물임을, 결론은 명확한데 답을 내기까지 과제를 부여받은 모든 이들이 남몰래 밤낮 앓는다. 모두가 아파 아무도 앓는지 모르는 정체성의 역설을 숙제로 품고 다들 살아간다. 전시장의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지희킴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심연의 정원〉 연작과 〈Body Proofs〉가 긴 벽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무너진 마음〉과 같이 의인화된 정서가 투영된 〈심연의 정원〉 연작에는 처연하리만치 생생한 생명력이 동식물 생태계에 넘실거리고 있다. 이 연작이 화면 안에서의 분투를 어느새 화면 밖에서도 감지하게 이끈다면 〈Body Proofs〉는 실존했던 분투를 결과물과 과정의 기록 양자로 전한다. 천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반복된 형상이 어떤 순간의 결과물인지 영상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지희킴의 분투는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 아니라 나와의 싸움, 즉 나의 고독이면서도 거기서 자라나는 혼종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북 드로잉 프로젝트〉(2011-ongoing) 중 〈New York〉은 알록달록한 색지 색상과 매니큐어에 시선이 먼저 닿게 한다거나 〈Curve〉와 같이 기하학적 문양과 패턴이 책 본연의 차트보다 시각적 강세를 띠는 경우도 있다. 내용을 괄호친 채 드로잉이 펼쳐진 이 책들은 기부의 형식으로 작가 손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희킴의 작가노트 속 “기부라는 선한 제스쳐”라는 표현은 손 드로잉과 건넴의 손길, 그 두 제스쳐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선한 제스쳐라는 표현에서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김희수 선생에게서 건네어지고 또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모종의 유산이 무엇일지 자연스럽게 반추하게 만든다.
최영의 〈작은 빛〉은 소설과 또 한편 강지윤의 협업으로 재처리된 영상, 이 두 개의 물성을 띠며 전시로 엮였다. 듀얼 모니터로 출력되는 소설은 눈으로 따라 읽기에 걸리는 시간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검은 바탕에 하얀 텍스트로 끊임없이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전개를 통해 타전의 원출처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소설 『작은 빛』을 정독한 건 전시 후의 일로서, 시작은 렘브란트의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런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 우리에게는 〈야경(夜警)〉으로 더 익숙한 회화에서부터다. “이 젊은이를 차별 없이 대해 주세요”라는 짧은 전갈이 실마리를 이루는 소설은 지백 벚꽃 핀 봄에 시작해서 재단 15주년 창립 기념 전시를 하루 앞둔 날까지를 주된 배경으로 한다. 재단 건물을 배경으로 전시와 공연이 쉼 없이 이어지고, 그 시간대에 편입해 들어오는 과거의 결심, 그 결심을 전승해 온 역사가 군데군데 자리한다. ‘세상의 모퉁이’에 자리하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도 “찬연한 빛이 아니어도/그저 세상 한 모퉁이 밝히는/작은 빛이라도 되었으면” 바람을 전하는 어른이 다시 등장하여 전승의 의미를 현재화시킨다. 메타픽션이자, 하이브리드 문학, 그러면서도 실존 인물이 느슨하게 발 걸치고 있는 소설을 읽으며 내가 쥔 돌은 조약돌 아닌 부싯돌이었을까 다시금 촛불색 책자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겹낫표 『』와 겹화살괄호 《》 사이, 문학과 미술 그 사이 빛이 있어 구별을 가능케 하지만 분별이 끝이 아니라서 어루만짐이 있다. 아직 동교 김희수 선생을 잘 알지 못하나 기림은 남은 몫을 헤아리고 나누는 이들에게 전해질 온기로 형태와 방식을 대신하지 않을까. 기림은 부과된 과제라기보다, 체온을 서로 나누는 그만큼의 따뜻함과 넉넉함으로 옆지기와 나누는 작은 빛의 마음 씀이다. 기림은 모두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큰 목소리와 격한 반응으로 힘을 배가시켜 주위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작은 빛 그 촛불색으로 위세 없이 주어질 때 어느새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많은 사실과 이야기를 덜어내더라도 그렇다. 그럴 때 오늘의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