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김남시
_김명범의 사물메타포
김명범의 작품은 메타포들의 저장고다.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메타포들은 아래와 같은 문장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깃발 같은 포장재(
김명범의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사물을 하나로 결합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대상/사물을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메타포의 원리다. 연결되는 그 두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그 연결이 대상들을 연결하는 우리의 익숙한 관습적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있을수록, 그렇게 연결됨으로써 생겨나는 미적 효과는 더 커진다. 그렇게 해서 창출되는 성공적인 메타포1)는 우리의 관습적 눈꺼풀을 벗겨내어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준다. 많은 철학자들이 메타포의 세계를 여는 Welterschließende 역할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존재론 Object-Oriented-Ontology의 창시자 그레이엄 하먼에게도 메타포는 모든 것과의 관계들에서 근본적으로 퇴은 withdrawn한 객체가 그 실재의 내밀한 면모를 드러내는 진귀한 사례에 속한다. 예를 들어 “와인처럼 검은 바다”라는 메타포는 ‘바다’와 ‘와인’을 연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바다라는 객체의 감각 성질들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실재객체 Real-object 바다의 면모를 계시해준다.2) 하먼에 따르면 이 순간 ‘바다’는 모든 직서적 바다-성질들에서 벗어나 즉자적 감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 객체와 “융합 fusion”3) 하는데 이로부터 그가 “매혹 allure”이라고 칭하는 미적 경험이 일어난다.
그런데 단어가 아니라 사물을 결합하는 김명범 작가의 시각적 메타포는 텍스트로 구현되는 메타포와는 다른 양상의 미적 경험을 불러낸다.
첫째, 순서에 따라 쓰여져야 하는 선행적 텍스트에서는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서는가에 따라 메타포의 구조가 달라진다. “와인같은 바다”와 “바다같은 와인”은 동일한 두 객체를 결합한 메타포이지만 각각 수식하는 항과 수식되는 대상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메타포가 된다. 이와는 달리 사물을 결합하는 김명범의 시각적 메타포의 경우에는 관객의 해석/번역에 따라 수식항과 피수식항이 얼마든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작품
둘째, 사물 오브제들은 쓰여진 단어는 갖기 힘든 고유한 물질성의 구조를 갖는다.
셋째, 일상 사물은 텍스트의 단어보다 훨씬 밀도 깊이 우리 삶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과 관계 맺는다. 예를 들어 작품
넷째, 단어와 달리 사물은 그 물질성으로 인해 상태가 변화하는데, 작가는 사물의 이 변화성을 적극 활용한다. 단어 ‘풍선’은 움직이지 않지만, 사물-풍선은 헬륨가스를 넣으면 빵빵해져 하늘로 올라가다 가스가 빠지면 크기가 줄어들며 땅으로 내려온다.(
사물의 물질성에는 그 사물의 취약성과 마모성이 포함된다. 사물은 변하면서 낡고, 변질되고, 마모되어간다. 글로 쓰인 단어 ‘청바지’는 언제라도 변하지 않지만 사물로서의 청바지는 오래 입으면 무릎이 튀어나오고 얇아져 헤지기 마련이다. 종이에 쓰인 단어 ‘의자’와는 달리 사물-의자에는 시간이 지나면 뽀얀 먼지가 내려앉는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김명범의 작품에는, 이런 사물의 낡음을 활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으르내려 닳아진 계단, 오래 사용해 칠이 벗겨진 지팡이 손잡이, 먼지 쌓인 창문 등 우리 주변에는 마모되고, 낡아가는 부지기수의 사물들이 있다. 시간의 흔적을 담은 이런 마모되고, 낡고, 훼손된 사물들은 적지 않은 작가들에 의해 작품화된다.4) 그런데 김명범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하나같이 새끈하다. 어디에도 오랫동안 사용하고, 낡고, 마모된 흔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이번 전시에 출품된 회전 놀이기구 정도다.) 이 작가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의 머리뼈는 낡음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이상 낡거나 부패하지 않는 사물 결정체다.5)
김명범 작품의 이런 특성은 아마도 이 작가가 견지하는 일종의 비-인간주의 non-humanism 원칙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물이 마모되고, 낡고, 쓸모없어지는 건 주로 인간과의 접촉 때문이기에 이런 사물들은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시간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물을 활용하면서도 그 사물 자체의 맥락과 구조 말고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주의적 요인들을 배제하려는 태도. 이것이 김명범 작품이 주는 미니멀하고 산뜻한 인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 날 감동시킨 두 메타포만 소개해본다. 하나는 독일 문학가 Ludwig Börne의 다음 문장이다. 심장의 ‘박동 Schlag’을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때림 Schlag’과 연결시켰다. “Jeder Schlag des Herzens schlägt uns eine Wunde, und das Leben wäre ein ewiges Verbluten, wenn nicht die Dichtkunst wäre.” 다른 하나는 고대 저술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등장한다.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에게 사랑은 우리 속에서 들끓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씨앗인 원자들로 설명된다. 그 씨앗은 성년의 나이가 되면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 몸으로부터 떠나서 힘줄의 정해진 자리로 모여 곧장 몸의 생식하는 부분 자체를 자극한다.“(1045 행) 씨앗으로 흥분되고 부푼 그 장소는 맹렬한 욕망이 지향하는 곳을 향하는데, 그것이 향하는 곳은 ”정신이 사랑으로 상처입은 그 육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상을 입은 쪽으로 쓰러지며, 피도 우리가 타격을 당한 바로 그 방향으로 뿜어나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누스의 무기에 타격을 받은 사람은...타격이 비롯된 곳, 거기로 향하고 결합을 행하고자 육체로부터 육체로 액체를 이끌어 쏘아 보내고자 한다.“(1055행)
2) “한 감각적 객체에 그럴듯한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은 새로운 감각적 성질을 부여하면 – 예를 들어 ‘와인처럼 검은 바다’ - 감각 객체 ‘바다’는 취소되고 저 낯선 성질들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수행하려면 신비로운 실재 객체가 요구된다. 실재 객체로서의 바다는 접근할 수 없이 물러났기에 그 은유의 감각적 성질은 그 대신 이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은 유일한 실재 객체에 의해 지지되게 되는데, 그것이 이 은유의 실재 경험자인 나 자신이다.“ Graham Harman, Object-Oriented Ontology. A New Theory of Everything, 2018, Pelican, p. 85.
3)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역, 2019, 현실문화, p. 186.
4) 당장 떠오르는 사례는 2006년에서 2015년까지 사용한 작가의 요가매트로 만든 김수자의 <몸의 기하학>(2015), 버려진 폐가구를 수거해 조형물을 제작하는 민성홍 작가, 사람들이 쓰던 냄비, 대야 등을 모아 구조물을 만드는 최정화 작가 등이다.
5) 뼈와 해골에 대한 이런 해석은 김남시, “살갗 없는 몸짓. 김두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