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X리뷰

Critic: 김남시
_김명범의 사물메타포

2024 수림미술상 수상작가 김명범 개인전 《물질, 접속사, 마찰음》 평론
김명범의 사물 메타포

글 : 김남시(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 내용

    김명범의 작품은 메타포들의 저장고다.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메타포들은 아래와 같은 문장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깃발 같은 포장재(), 나뭇가지 같은 사슴뿔(, 2011), 해머같은 지팡이(, 2014), 화살같은 연필 혹은 화살촉 같은 연필심(, 2016), 셔틀콕 같은 새(, 2013), 사슴머리 같은 고무풍선(, 2013, 2017), 2인용 침대 같은 풀밭(, 2004), 촛불 같은 금붕어(, 2010), 바이얼린 같은 테니스 라켓(, 2010)...이 무미건조한 문장들은 작품을 일차적 구성 요소들로 나누고 각각을 직서적 literal으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즉자적 수준의 경험주의적 답변이다. 약간의 문학적 상상력을 더하면 작품들은 좀 더 역동적이고 동사적으로도 번역된다. ‘포장재들이 승전 깃발처럼 매달려있다.’, ‘사슴 뿔이 나뭇가지처럼 자라난다.’, ‘지팡이가 해머처럼 무겁다.’, ‘연필이 화살처럼 날아간다.’, ‘새처럼 날아가 꽂히는 셔틀콕’, ‘고무풍선을 뚫고 자라나는 사슴 뿔’, ‘풀밭처럼 편안한 침대’, ‘불꽃처럼 타오르는 금붕어’, ‘바이얼린 활처럼 공기를 가르는 라켓’....여기서 사물-메타포에 대한 번역과 감상은 작품에 등장하는 일상 오브제들에 대한 관객의 경험과 기억, 그에 기반해 피어나는 연상과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지팡이를 짚고 한발 한발 힘겹게 이동하는 노인의 경험을 아는 사람에게 해머가 달린 지팡이(Untitled, 2014)는 노년의 힘겨움을 연상시킬 것이지만, 화난 노인이 휘두르는 지팡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위협감을 느낄 수도 있다.

    김명범의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사물을 하나로 결합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대상/사물을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메타포의 원리다. 연결되는 그 두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그 연결이 대상들을 연결하는 우리의 익숙한 관습적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있을수록, 그렇게 연결됨으로써 생겨나는 미적 효과는 더 커진다. 그렇게 해서 창출되는 성공적인 메타포1)는 우리의 관습적 눈꺼풀을 벗겨내어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준다. 많은 철학자들이 메타포의 세계를 여는 Welterschließende 역할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존재론 Object-Oriented-Ontology의 창시자 그레이엄 하먼에게도 메타포는 모든 것과의 관계들에서 근본적으로 퇴은 withdrawn한 객체가 그 실재의 내밀한 면모를 드러내는 진귀한 사례에 속한다. 예를 들어 “와인처럼 검은 바다”라는 메타포는 ‘바다’와 ‘와인’을 연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바다라는 객체의 감각 성질들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실재객체 Real-object 바다의 면모를 계시해준다.2) 하먼에 따르면 이 순간 ‘바다’는 모든 직서적 바다-성질들에서 벗어나 즉자적 감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 객체와 “융합 fusion”3) 하는데 이로부터 그가 “매혹 allure”이라고 칭하는 미적 경험이 일어난다.

    그런데 단어가 아니라 사물을 결합하는 김명범 작가의 시각적 메타포는 텍스트로 구현되는 메타포와는 다른 양상의 미적 경험을 불러낸다.

    첫째, 순서에 따라 쓰여져야 하는 선행적 텍스트에서는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서는가에 따라 메타포의 구조가 달라진다. “와인같은 바다”와 “바다같은 와인”은 동일한 두 객체를 결합한 메타포이지만 각각 수식하는 항과 수식되는 대상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메타포가 된다. 이와는 달리 사물을 결합하는 김명범의 시각적 메타포의 경우에는 관객의 해석/번역에 따라 수식항과 피수식항이 얼마든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작품 는 ‘바이얼린을 연주하듯 공기를 가르는 테니스 라켓’으로도, 아니면 ‘테니스를 치듯 연주되는 바이얼린’으로도 읽을 수 있다. 관객의 경험과 상상에 따라, 예를 들어 바이얼린에서 바이얼린 활, 현과 활의 접촉에서 나오는 소리로, 테니스 라켓에서 그것이 쳐내는 공, 공이 라켓과 바닥에 튕기는 경쾌한 소리로 이어지는 연상들이 서로를 넘나들며 결합하면 우리는 이 작품 앞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진귀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둘째, 사물 오브제들은 쓰여진 단어는 갖기 힘든 고유한 물질성의 구조를 갖는다. (2009)는 ‘성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성냥-사물의 구조를 활용, 성냥개비 막대 양 끝에 인화물질을 바르고, 불을 붙여 만들었다. 비슷하게 (2009)도 양초 양쪽에서 심지를 뽑아 만들었고, (2010>에서는 뒤 축이 하나로 붙어있는 구두를, (2004)에서는 천장까지 뻗은 나무줄기 위에 거꾸로 뒤집힌 화분을 매달아 바닥 화분과 대칭적인 화분을 설치했다. 이 작품들은 ‘성냥’, ‘양초’, ‘낡은 구두’, ‘화분’이라는 단어는 보여줄 수 없는 그 사물들의 구조에 입각해 있으며 그로 인해 언어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사물적 메타포를 창출한다. 양쪽에 불이 붙은 성냥이나 양초, 뒤축이 하나로 붙어있는 구두는 관객의 경험과 상상력에 따라 사면초과나 진퇴양난, 딜레마나 자기모순 등의 메타포를 불러낼 수 있다. 생일 케이크용 초 위에 솜털 달린 민들레 씨앗을 결합한 (2017)도 ‘케이크 초’와 ‘민들레 씨앗’이라는 단어만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두 사물 고유의 물질성에 기반한 작품이다. 이로부터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기 위해 입으로 바람을 불면 민들레 씨앗이 날아갈 것이라는 아름다운 시적 상상이 생겨난다.

    셋째, 일상 사물은 텍스트의 단어보다 훨씬 밀도 깊이 우리 삶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과 관계 맺는다. 예를 들어 작품 는 김명범 작가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테니스 라켓과 어머니가 연주하던 바이얼린을 결합해 만든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바이얼린과 테니스 라켓은 ‘바이얼린’과 ‘테니스 라켓’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작가 삶의 구체적 맥락과 결부된 개별 객체라는 것이다. 택배 물품을 싸고 있는 다종다양한 포장재들, 동네 놀이터의 회전 놀이기구, 고무풍선, 출입 차단 벨트, 생일케이크 초, 막대사탕, 새장, 금붕어 등 이 작가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우리 삶의 특정 맥락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일상 사물들이기에, 우리는 이들이 무엇이고, 어디 사용되며, 어떤 상황에 등장하는 것인지를 잘 안다. 김명범 작가의 작품이 그를 접하는 관객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경험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 이유다.

    넷째, 단어와 달리 사물은 그 물질성으로 인해 상태가 변화하는데, 작가는 사물의 이 변화성을 적극 활용한다. 단어 ‘풍선’은 움직이지 않지만, 사물-풍선은 헬륨가스를 넣으면 빵빵해져 하늘로 올라가다 가스가 빠지면 크기가 줄어들며 땅으로 내려온다.(, 2008. , 2010, , 2016) ‘촛불’이라는 단어는 언제까지 같은 길이와 크기의 불을 밝히겠지만, 사물로서의 촛불은 심지가 짧아지며 언젠가는 꺼지고 만다.(, 2009). ‘눈(雪)’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사물-눈은 시간이 지나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007, , 2007)

    사물의 물질성에는 그 사물의 취약성과 마모성이 포함된다. 사물은 변하면서 낡고, 변질되고, 마모되어간다. 글로 쓰인 단어 ‘청바지’는 언제라도 변하지 않지만 사물로서의 청바지는 오래 입으면 무릎이 튀어나오고 얇아져 헤지기 마련이다. 종이에 쓰인 단어 ‘의자’와는 달리 사물-의자에는 시간이 지나면 뽀얀 먼지가 내려앉는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김명범의 작품에는, 이런 사물의 낡음을 활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으르내려 닳아진 계단, 오래 사용해 칠이 벗겨진 지팡이 손잡이, 먼지 쌓인 창문 등 우리 주변에는 마모되고, 낡아가는 부지기수의 사물들이 있다. 시간의 흔적을 담은 이런 마모되고, 낡고, 훼손된 사물들은 적지 않은 작가들에 의해 작품화된다.4) 그런데 김명범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하나같이 새끈하다. 어디에도 오랫동안 사용하고, 낡고, 마모된 흔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이번 전시에 출품된 회전 놀이기구 정도다.) 이 작가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의 머리뼈는 낡음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이상 낡거나 부패하지 않는 사물 결정체다.5)

    김명범 작품의 이런 특성은 아마도 이 작가가 견지하는 일종의 비-인간주의 non-humanism 원칙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물이 마모되고, 낡고, 쓸모없어지는 건 주로 인간과의 접촉 때문이기에 이런 사물들은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시간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물을 활용하면서도 그 사물 자체의 맥락과 구조 말고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주의적 요인들을 배제하려는 태도. 이것이 김명범 작품이 주는 미니멀하고 산뜻한 인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 날 감동시킨 두 메타포만 소개해본다. 하나는 독일 문학가 Ludwig Börne의 다음 문장이다. 심장의 ‘박동 Schlag’을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때림 Schlag’과 연결시켰다. “Jeder Schlag des Herzens schlägt uns eine Wunde, und das Leben wäre ein ewiges Verbluten, wenn nicht die Dichtkunst wäre.” 다른 하나는 고대 저술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등장한다.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에게 사랑은 우리 속에서 들끓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씨앗인 원자들로 설명된다. 그 씨앗은 성년의 나이가 되면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 몸으로부터 떠나서 힘줄의 정해진 자리로 모여 곧장 몸의 생식하는 부분 자체를 자극한다.“(1045 행) 씨앗으로 흥분되고 부푼 그 장소는 맹렬한 욕망이 지향하는 곳을 향하는데, 그것이 향하는 곳은 ”정신이 사랑으로 상처입은 그 육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상을 입은 쪽으로 쓰러지며, 피도 우리가 타격을 당한 바로 그 방향으로 뿜어나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누스의 무기에 타격을 받은 사람은...타격이 비롯된 곳, 거기로 향하고 결합을 행하고자 육체로부터 육체로 액체를 이끌어 쏘아 보내고자 한다.“(1055행)

    2) “한 감각적 객체에 그럴듯한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은 새로운 감각적 성질을 부여하면 – 예를 들어 ‘와인처럼 검은 바다’ - 감각 객체 ‘바다’는 취소되고 저 낯선 성질들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수행하려면 신비로운 실재 객체가 요구된다. 실재 객체로서의 바다는 접근할 수 없이 물러났기에 그 은유의 감각적 성질은 그 대신 이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은 유일한 실재 객체에 의해 지지되게 되는데, 그것이 이 은유의 실재 경험자인 나 자신이다.“ Graham Harman, Object-Oriented Ontology. A New Theory of Everything, 2018, Pelican, p. 85.

    3)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역, 2019, 현실문화, p. 186.

    4) 당장 떠오르는 사례는 2006년에서 2015년까지 사용한 작가의 요가매트로 만든 김수자의 <몸의 기하학>(2015), 버려진 폐가구를 수거해 조형물을 제작하는 민성홍 작가, 사람들이 쓰던 냄비, 대야 등을 모아 구조물을 만드는 최정화 작가 등이다.

    5) 뼈와 해골에 대한 이런 해석은 김남시, “살갗 없는 몸짓. 김두진의 ”, 김두진 작가 전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