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함께 마시는
맥주 한 캔 정도의 에너지
김서해 (은행나무 편집자)
오거리 횡단보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한 육교 위에서 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신호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량들이 꼭 레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밤 8시 무렵이었는데, 야근을 하고 나왔는지 지친 기색으로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 달뜬 표정으로 동행과 수다를 떠는 사람들,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재바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등 그 면면의 사연이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짊어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겠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하루를 보낸 사람도, 다신 없을 끔찍한 하루를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쉽지는 않았을 하루. 그렇다면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혹은 하루치 노동을 하기 위해 나서는 길―위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평생 ‘직접’ 보지는 못할 나의 표정이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노동은 현실이다. 누군가에게는 꿈이기도 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생계 그 자체가 된다. 생계는 꿈과 달리 무한히 낭만적이지도, 그저 아름답지만도 않다. 먹고사는 일이 다 그러하듯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까지는 바랄 수 없는 날들이 돌연 나에게 닥쳐올 수도 있다. 김의경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그 ‘생계’를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을 묵묵히, 씩씩하게 걸어 오른다. 일상과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 꿋꿋하게 나아간다. 《두리안의 맛》에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노동자들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삼각김밥을 만들고, 시디를 포장하고, 잘 먹지도 못하는 매운 떡볶이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먹방 유튜브를 찍고, 파워블로거로 초청되어 팸투어를 다닌다. 대개 비정규직 노동자로, 부당한 상황에서도 항의하기 어려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나이가 많을수록 코너에 몰리고 항거불능 상태가 된다. 이는 그간 꾸준하게 청년 세대의 노동과 청춘에 대해 이야기해온 작가의 세대관이 중장년층, 노년층까지 확장됨을 의미한다.
은퇴한 장년층과 노년층의 경우 생계형 노동, 특히 몸을 써서 할 수 있는 노동의 선택권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체력적으로, 신체적으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그들은 언제든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날 선 불안 위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삼각김밥 공장의 노동 환경을 그리고 있는 〈순간접착제〉는 육체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세대 간의 갈등과 오해를 전면에 내세운다. 소설에는 팬데믹 시대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삼각김밥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나’와 ‘예은’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그들을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곤경에 빠뜨리는 선배 노동자, 칠십 대 할머니 ‘소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처음엔 친절한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무상 고급 정보를 주는 척하면서 공장 관리자의 눈 밖에 나게 하고, 일을 수시로 방해하고, 손녀뻘인 그들을 자꾸만 경쟁상대로 여기는 소순 할머니를 두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와 ‘예은’은 이곳 말고는 할머니가 일할 수 있는 일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아가 할머니가 이곳에서 악착같이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알게 되면서 그들은 형용할 수 없는 양가감정에 빠진다. 소순 할머니를 바라보는 ‘나’와 ‘예은’의 시선은 독자의 시선과 맞물린다.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표제작 〈두리안의 맛〉은 태국으로 팸투어(인플루언서 등에게 협찬 형태로 제공되는 여행 상품. 주로 홍보 목적이며, 추후 여행 후기를 개인 블로그나 SNS에 업로드해야 한다)를 떠난 파워블로거 ‘윤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는 주로 현장에서의 노동을 다루던 김의경 작가가 온라인을 경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소설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팸투어로 여행을 제공받게 된 ‘윤지’는 달뜬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여행지에서 찍은 예쁘고 멋진 사진들을 수시로 올리며 갖가지 해시태그를 달기도 한다. 조금 불쾌한 일이 생겨도 ‘공짜’ 여행이라는 이유로 싫은 티를 내지 못하고 무조건 참는다.
윤지의 SNS 피드는 그녀의 진짜 삶이 아닌 편집된 삶이다.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는 얼굴,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 가장 비싸 보이는 물건 등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는’ 것들만 찍고, 엄선하고, 업로드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누르고 팔로우를 하기 때문이다. 계정이 커질수록 윤지에게 들어오는 협찬은 많아질 것이고, 이는 ‘좋아요 굴레’에 삶이 결박될 것임을 예고한다. 하지만 팸투어 도중 변수가 생긴다. 윤지가 올리는 게시물마다 묘하게 불쾌한 뉘앙스로 댓글을 다는 악플러가 나타난 것이다. 좋은 말로 애써 웃으며 답글을 달던 윤지는 끝내 평정심을 잃고 만다. 급기야는 자신이 ‘블로거’가 아니라 ‘블로거지’ 같다는 생각까지 한다. 김의경은 〈두리안의 맛〉의 맛을 통해 편집된 ‘인플루언서’의 삶의 명암을 그린 뒤, 이에 그치지 않고 ‘여성 인플루언서’가 겪게 되는 불쾌하고 부당한 순간까지 소설 곳곳에 녹여낸다. 이는 우리 사회의 초상을 한 면이 아닌 양면으로 바라보게 하고 다양한 관점에서의 독해를 가능케 한다.
한편 약자들만 남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숙명이 된다. 〈주인집 딸〉은 이런 아이러니를 가장 날것으로 펼쳐놓는 소설이다. 반지하 전셋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갑작스러운 퇴거 요청을 받는다. 주인집 어르신이 위독한 상황이라 딸이 가족의 간호를 위해 반지하에 대신 들어와 살아야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임종이라도 곁에서 지키고 싶다는 주인집 딸의 말에 ‘나’는 마음이 약해지지만, 갑자기 이사를 갈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 되지 않기도 했거니와 계약서상 부당한 요구라 들어줘야 할 의무도 없었다. ‘나’의 남편은 그냥 딱 잘라 거절하라고 하지만 이유가 이유인지라 ‘나’의 마음은 점점 힘들어진다. ‘나’는 그간의 사정을 듣는 과정에서 주인집 딸과 조금씩 가까워진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나’와 주인집 딸 사이의 관계는 변화의 물살을 탄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안쓰럽게 생각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아픈 가족을 위해 이사를 나가달라고 하는 사람도,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당장 이사를 나갈 수 없는 사람도 각자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김의경 소설 속 인물들은 사람을 탓하지 않고 상황을 탓한다. 이는 너무나 쉽게 상황이 아닌 사람을 향해 화살을 돌려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여덟 편의 소설을 한데 묶는 것은 여성 노동자들의 ‘느슨한 연대감’이다. 김의경 소설에는 그들을 구제해줄 ‘백마 탄 OO’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을 무력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만이 존재한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임한다. 하지만 옆자리 동료나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고 꺼내줄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적어도 기댈 등을 내어줄 정도의 여유와 온기가 있다. 〈시디팩토리〉의 ‘나’가 하령을 보며 “나는 하령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앞으로 같이 알바를 다니자고 했다. 하령은 그럼 덜 심심하겠다며 좋다고 했다. (……) 밖으로 나와 걷는데 웃음이 나왔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이 끝끝내 잃지 않는 건 고된 일을 마치고 함께 마시는 맥주 한 캔 정도의 에너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에너지는 우리가 끝끝내 잃지 말아야 할 에너지일지 모른다. 하루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캔을 비우며 내일을 맞이할 에너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