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X리뷰

Review: 정은진
_빛이 조용한 소란 속을 흐르는 방식

2025년 수림북클럽 선정도서 도서리뷰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서유미 외 10명
-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 최영(수림문학상 수상작가)

글: 정은진(문학동네 편집자)
  • 내용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은 다소 낯선 도입부를 독자 앞에 들이민다. 빛의 성질에 대해 서술하는 번역투의 문장이 이 단편의 첫 문장인데, 작가가 이 문장에 걸어둔 여러 의도를 곱씹기 위해 잠시 이 페이지에 머무르다보면 흥미가 동한다.

    도입이 다소 색다르게 느껴진 데에는 첫 문장에 달린 주석도 한몫할 것이다. 주석의 내용이 보통 소설에 달리는 것들보다 전문적인 편이다. 영어의 어떤 구문을 옮긴 표현인지, 그 옮김의 방식에 번역가의 의도나 해석이 얼마나 소거되어 있는지 일러주는 이 주석은 부연설명을 하는 이가 번역에 상당한 경험을 쌓은 사람임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하겠지만 첫 페이지를 지나면 이 단편이 번역가의 일상과 고민을 다룬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첫 문장은 번역가에 대해 쓰려 하는 작가가, 소설을 읽어나갈 독자를 위해, 소설 속 번역가 캐릭터들에게 다가갈 표식을 남긴 거라고 읽어보면 어떨까. 극도의 수동적 표현이 쓰인 문장을 부러 표식으로 삼은 데에도 의도가 있으리라. 번역가란 얼마나 자신의 인격이 글에 개입되지 않도록 애쓰는 존재인지, 얼마나 자주 지워져온 존재인지, 이 첫 문장은 에두르면서도 효과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구성적으로는 마치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해 작품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도입부를 읽으며 뻗어나가고, 요동치고, 반짝이는 빛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띄우고 다음 페이지로 눈을 옮기는 순간, 구체적인 공간이 불쑥 눈앞에 나타나는데 그곳에도 연한 빛이 비쳐들고 있다. 바로 다정이 퇴직금 관련 상담을 받고 있는 사무실. 다정은 회사에서 번역 담당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번역뿐만 아니라 통역 일까지 떠맡는 등 부당한 회사생활에 심히 지쳐 있다. 퇴직금을 받으려면 스스로 버틸 수 있다고 느끼는 기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조언을 받은 다정은 쓸쓸히 사무실을 나선다. “일 분이라도 회사로 먼저 들어갈 이유가 없었기에”(이런 문장들에 우리 직장인 독자 여러분은 공감하고 또 환호하지 않았을까) 다정은 회사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간다. 그리고 카페 안에는 역시나 무척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노트북을 하나씩 펴놓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다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마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그곳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것이다. 카페의 통창을 통해 빛은 우리를 계속 따라온다.

    카페 안에는 다정처럼 번역 일을 하는 두 사람이 함께 섞여 앉아 있다. 프리랜서로 영상 번역을 하는 소연과 출판 번역에 뛰어든 희정. 이후 소설은 다정, 소연, 희정이 지닌 사연과 각자의 고민을 교차 서술한다. 소연은 영상 번역 일을 꾸준히 하면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프리랜서다. 이제 자신에게 더욱 이득이 되는 업무를 골라 맡을 정도로 자리잡아 뿌듯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번역으로 얻을 수 있는 임금이 투입한 노동력에 비해 높지 않아 씁쓸하기도 하다.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하는 만큼 돈이 들어온다. 프리랜서라면 원할 때 쉴 수 있도록 ‘프리’해야 하는데, 먹고살려면 쏟아지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받아 ‘쳐내야’ 한다. 끝없이 쳇바퀴를 굴리는 것만 같은 피로감에 소연은 고민한다.

    반면 희정은 일감이 없어서 카페에 나와 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다. 심지어 일을 마쳐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다. 출판업계가 영상 업계보다 영세한데다 출판사들은 번역서가 실제로 출간된 후에야 번역료를 정산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기까지가 또 다사다난하고 책이 언제 출간될지는 출판사도 알 수 없으니, 과연 책을 번역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여기에 희정의 개인사까지 겹쳐 읽으면 더욱 착잡한 심정이 된다. 회사에 적을 둔 남편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육아는 고스란히 희정의 몫. 아이가 얼추 크기 전까지 희정은 번역 일마저도 수행하지 못한 채 ‘누구네 엄마’로 살아야만 했다. 분명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생김으로써 희정의 삶의 궤도만 이다지도 달라지다니.


    이처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번역이라는 일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 지닌 개개의 고민을 읽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 단편의 진정한 묘미는 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이 세 사람이 ‘교차하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다정, 소연, 희정은 같은 공간에 앉아 다른 생각을 하는 틈틈이 서로를 눈에 담는다.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가지러 가는 길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머릿속을 환기하는 동안. 다정은 소연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영상 번역을 하면 훨씬 행복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고, 소연은 희정이 하는 출판 번역에 약간의 동경심을 지닌 채 번역가의 이름을 작품에 함께 올려주지 않는 영상 번역 업계에 대한 불만을 쌓아두고 있으며, 희정은 다정처럼 큰 회사에 들어가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꿔본다. 각자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 이 세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올까. 서로가 자리를 바꾸면 각자의 문제는 해소될 것인가.

    더욱 재미있는 점은 세 사람의 눈에 그들은 꽤 괜찮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서로 비슷한 업계에 있다는 사실을 가려놓고 본다면 말이다. 다정은 슈트를 멀끔히 차려입고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우먼으로 비친다. 소연은 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돈벌이도 문제없이 해내는 멋진 프리랜서 같다. 희정은 깔끔하고 단아한 용모를 갖춘 등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어른’ 여성처럼 보인다. 세 사람이 서로의 삶을 동경하며 동상이몽에 빠질 수 있는 건 개개의 삶이 지닌 난경을 본인 말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소설 속 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모두가 그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때로는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한다는 진실을 이 소설은 형상화해 보인다.

     카페의 좌석 하나씩을 차지하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매일같이 보는 그 조용한 풍경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그 사람들의 내부에서, 앞에 펼쳐둔 노트북 화면 위에서 어떤 갈등과 전쟁이 펼쳐지고 있을지 헤아려본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은 그 조용한 소란을 유려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빛은 점차 이울고 잦아들면서 카페 안을 감돈다.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고, 번역가들의 업무 시간도 이렇게 끝나간다. 어떻게든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도모해야 하는 그 시간대의 신산함에 대해 쓰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다, 문득 깨닫는다. 이 번역가들의 일이, 과연 해가 저문다고 끝날까? 다정은 이제 회사로 들어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고, 소연은 마감 기한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밤낮없이 일할 것이며, 희정은 당장 일이 없으니 구직활동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집안일을 병행하며. 
    그러니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산함은 단순히 저무는 빛 때문에 느껴지는 게 아닐지도. 이들의 밤은 빛이 저문 후에도 조용히, 소란스럽게 이어질지 모른다는 예감. 그 끝없는 들끓음의 시간이 소설 안팎에 예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