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실은 위험한 소설

글쓴이 소개
고우리(마름모출판사 편집자)
  • 내용
    2025년 수림북클럽 선정도서 도서리뷰
    장강명 외,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실은 위험한 소설
    ─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중 장강명의 〈투란도트의 집〉을 읽고

    이 책에 대해서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그 전사(前事)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2024년 4월의 청명한 어느 날,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 정아은 · 장강명 작가의 공동 북토크가 열렸다. 주제는 ‘당신은 어떻게 글을 쓰고 있나요?’ 북토크가 끝나고, 응원을 온 작가들과 함께 ‘막둥이네 만남의 장소’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장강명 작가에 의하면 소설가 5인과 출판사 편집자 1인이 치킨과 맥주와 골뱅이소면을 먹으며 무슨 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눴느냐 하면, 그런 건 없었다. 문득 장 작가가 인터넷에서 본 불륜 카페 ‘썰’을 풀기 시작했는데, 마침 도봉산을 타고 내려와 맥주를 마시는 남녀 등산객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장 작가 어머니의 지인의 지인이 사랑을 좇다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이야기에 이르렀다.

    와, 그 이야기 소설로 써도 좋겠는데요? 하고 편집자가 외쳤던가 속으로 생각했던가 그랬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실마리가 되어 다섯 작가가 떠들고 웃고 마시다, “우리 같이 불륜 앤솔러지 해볼래요?”에 이르렀다. 자리를 옮겨 맥주에서 커피로 종목이 바뀌는 동안 ‘불륜’이라는 주제는 ‘순화’되어 ‘금지된 사랑’이 되었고, 그렇게 이야기의 폭을 넓히기로 합의를 보았다. 편집자는 이 기획에 근사한(?) 이유를 붙였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 말해보기로. 은폐된 이야기야말로 문학이라고. 농담 같았던 그 자리가 가장 문학적인 자리가 된 셈이다. 

    어머니의 지인의 지인 이야기를 쓰기로 했던 장강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썼다. 나는 무엇보다 장강명이 ‘금지된 사랑’이라는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쓸지 궁금했다. 그가 지금껏 쓰지 않았던 영역이고, 쓸 거라 생각도 못 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티프로 한 이 소설에 그는 〈투란도트의 집〉이란 제목을 붙였다(‘집’과 ‘방’ 사이에서 고민했던 걸로 안다). 일부러 이름과 직업을 특정하지 않은 여주인공에 기이한 사랑의 피해자 투란도트 공주가 투영되었고, 그녀의 집에서 역시 기이하다 할 만한 사랑이 일어난다. 

    두 눈 사이의 거리가 멀어 ‘심해어’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물아홉 살 남성이 자기보다 직급이 세 단계가량 위인 여성과 섹스를 나눈다. 작가는 여성의 외모에 대해 “미인”이라고 간단히 묘사하는 데 반해, 그녀의 집에 대해서는 거의 두 페이지를 할애한다. 여자가 처음 등장한 이후부터 자주 함께 등장하는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형용사는 이제 더 깊어져, ‘삭막하고 황폐하다’는 표현으로 넘어간다. “카페나 바 같은 상업 공간이든, 평범한 사람의 집이든, 어떤 공간은 손님에게 말을 건다. 조명과 벽지와 가구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주인의 취향을 설명한다. 그녀의 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와 처음 말을 나눈 순간부터 끊임없이 남자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애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읽고, 라벨의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를 싫어하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지만, 남자는 그런 취향들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두침침한 모텔에서건 삭막한 그녀의 집에서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아낼 단서는 없다. 소통하거나 이해받거나 혹은 이해받길 기대하는 마음이 여자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여자가 입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꺼낸 건,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좋은 이유를 들자면, 철없는 남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남자가 여자에게 “나랑 결혼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지 말아요. 내가 지켜줄게요.”

    죽음의 지하실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사회적 금기이기 때문에, 어느새 알게 모르게 그것을 회피하는 기제가 우리 안에 내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죽고 싶다’는 말 대신 ‘그만하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변론으로 읽힌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회는 없다. 그들은 이들을 햇빛 아래로 끌어들이려 한다. 여자에게 “이렇게 살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남자처럼, 투란도트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는 칼라프처럼. 그리고 그 제스처가 많은 이들에게 ‘구원으로 읽힌다. 

    “소중한 것을 되살리려는 남편이 있는 집”을 나와 “어떤 소중한 것도 잉태하지 않는 장소”로 옮긴 여자에게 사랑은 자의든 타의든 금지된 것이 되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일정 부분 내재되어 있을 온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스스로 그러기를 원치도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와 섹스를 나누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남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남자는 여자를 떠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애초에 남자에게 여자는 금지된 사랑의 대상이었다. 남자는 “슬픈 사람들의 세상에 잘못 찾아온 한 마리 갓파였다.” 그는 유쾌하고 흥겨운 갓파들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어서, 애초에 슬픈 세상에 속한 여자와의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남편은 뭐랄까, 고결한 사람이야. 나를 사랑하고……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려 하지.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남편이 알고 있어. 너랑 이렇게 자는 것도 알아. 그래도 이해하겠대. 괜찮대. 기다리겠대. 내가 지금 망가져서 이러는 거래.”

    남편은 여자와 남자의 이른바 ‘금지된 사랑’을 용인하면서 스스로 금지된 사랑을 하는 인물이 된다. 여자와 남자가 자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여자가 언젠가 햇빛 아래로 걸어 나오기를 기다린다.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하지만 남편은 남자가 그러듯 여자가 소리 내지 않고 읊조리는 말을 읽었을까? 여자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치유되고 싶지 않아.” 

    여자는 어둠을 어둠인 채로, 죽음을 죽음인 채로 그냥 놓아두고 싶다. 그 기운이 너무도 강력하여 어떤 온기도 서늘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기운으로 삼켜버린다. 여자는 그래서 남편을 떠날 수밖에 없다. 강요하지 않고, 완력을 쓰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려주는 사랑일지라도. 그리고 남자를 떠날 수밖에 없다.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힘을 쓰고,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질지라도.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여자를 ‘구원’하려고 애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남자의 ‘금지된 사랑’은 오히려 정당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아마도 작품 전체에서 가장 큰 금기를 깨는 인물은 여자일 것이다. 여자는 죽음을 욕망하는 사람이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실은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삶도, 사랑도, 생명도 거부한다. “투란도트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러나 유일하게 여자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작가다. 작가는 여자가 절망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을 왜 죽은 채로 그냥 놔두면 안 된단 말인가? 잔해에 불과한 것들을 왜 억지로 좀비처럼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작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금기를 깨뜨린다. 그것도 가장 무겁고, 무서운 금기를. 그래서 나는 〈투란도트의 집〉이 실은 위험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