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2025년 수림북클럽 선정도서 도서리뷰
김하율, 『나를 구독해줘』
이제 내가 너의 이야기를 구독할게
대한민국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금싸라기 땅, 명동
그중에서도 100여 개의 화장품 매장이 들어선 코스메로드
그곳에서 펼쳐지는 유쾌발랄 마이너리티 청춘 성장담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김서령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든 편집자이기도 하죠. 편집자라는 건, 김하율 작가의 가족 혹은 절친을 제외하곤 이 소설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그날의 기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실 소설의 내용보다도 오래전 제가 서른 살이었던 순간을 더 여러 번 떠올렸던 날이었죠. 서른 살이란 불안하다가도 설레고, 좌절하나 싶었다가도 희망이 막 넘쳐 오르고…… 하여튼 굉장히 정신없는 시기잖아요. 안 그런가요?
소설은 주인공 정소민의 서른 번째 생일로 시작합니다. (아아, 어쩌나. 이거 봐요. 저는 지금 바로 제 서른 살 생일날을 떠올렸다니까요!) 그날, 소민은 엄마에게 생활비를 끊기고 고시원에서조차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공무원 시험에 몇 년째 떨어진 그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유화 어머니의 소개로 명동의 화장품 매장 [페이스페이스]에 취직하게 됩니다. 전공도 아니고, 경력도 없고, 심지어 중국어도 일본어도 못하는데 말이죠. 외국인 상권인 명동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우스운 상황. 이것이 소민이 서른 살에 마주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 강하오가 등장합니다. 하오는 소민과 산후조리원 동기입니다. 그야말로 30년 지기 부랄친구죠. 키 186센티미터, 훤칠한 외모의 하오는 호텔 프런트에서 일하며 자신의 작은 옥탑방에 갈 곳 없는 소민을 받아들입니다. 소민과 하오의 옥탑방, 줄여서 [하소옥]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설렁탕집 이름 같긴 하지만요.
소민은 하오의 옥탑방에서 흥미로운 진실을 발견합니다. 하오가 드래그 아티스트 ‘버거’라는 걸 알아버린 거예요. 금발 가발을 쓰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버거를 보고 소민은 충격을 받지만, 곧 하오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함께 뷰티 콘텐츠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작가가 그리는 화장품 산업과 명동이라는 공간은 매우 리얼합니다. 소민이 일하는 페이스페이스 매장에는 조선족, 한족 직원들이 대부분이고, 손님의 절반은 중국 관광객입니다. 매장 앞에는 강아지 옷을 파는 개사장님이 있고, 매일 제이의 등신대를 멍하니 바라보는 멍순씨가 있습니다. 키티할머니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야타맨은 보이지 않는 차를 운전하며 사람들에게 타라고 외칩니다. 이 기이하면서도 쓸쓸한 인물들은 명동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현장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안식처임을 보여줍니다.
소민은 매일 근무일지를 쓰면서 매출이 저조한 이유를 픽션처럼 지어냅니다. “북서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급속히 낮아져서”, “정치적인 문제로 일본 관광객의 유입이 저조해서” 같은 변명들이죠. 사장은 매출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이유와 대상을 찾아 열심히 원망합니다. 직원들은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고, 가이드는 관광객을 몰고 와서는 매출의 20퍼센트를 요구합니다. 10시간 동안 서서 일하다 보면 종아리가 부풀어 오르고, 직원 열 명 중 일곱 명은 하지정맥류를 앓습니다. 화려한 명동 뒤에 숨겨진 노동의 현실을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말짱한 말투로 그려내는지, 김하율 작가의 노련한 솜씨에 혀를 내둘렀던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 인물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을 보았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고깃집에서 일하며 손목에 보호대를 차고 다니는 유화, 스무 살에 임신했다가 유산하고, 보톡스를 맞으러 다니는 미영, 45분 일하고 15분 쉬는 패턴으로 노상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도우미 승임씨.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합니다. 작가는 이 인물들을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그저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단지 피해자나 약자가 아니라,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하는 생생한 존재하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김하율 작가가 좋아요. 따뜻한 시선을 볕뉘처럼 뿌린다니까요.
소민과 하오의 관계 변화도 이 소설의 중요한 축입니다. 30년 동안 부랄친구로 지내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하오는 소민이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일부러 그를 못생기게 화장해줬다고 고백하고, 소민은 그런 하오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챕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천천히 나아갑니다. 이들의 관계는 드라마틱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적이고 현실적이에요. 그래서 더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민은 코스메로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마이너리그 청춘들의 성장담]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린 이 소설은,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나를 구독해줘] 자체인 듯합니다. 소민은 말합니다. “이 소설은 아주 길어질 것 같다. 어쩌면 평생 연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으니까.”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참 뭉클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서사가 있고, 그 서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요.
소설의 제목 [나를 구독해줘]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튜브 구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를 인정해줘’, ‘나를 지켜봐 줘’라는 간절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소민은 부모에게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배제됩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고, 글을 쓰는 일입니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묘합니다.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불안합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실수하고, 자주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걸어갑니다.
독자 여러분도 소민과 하오의 이야기를 읽으며 저처럼, 여러분의 이야기를 함께 떠올렸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명동 같은 공간이 있겠죠. 낯설고 힘들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이 결국 여러분을 성장시킨 장소.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하오 같은 친구가 있을 거예요. 오랫동안 곁에 있었지만 미처 그 소중함을 몰랐던 사람. 이 소설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구독해줘]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버려지지 않을 권리, 사랑받을 자격,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분이 소민과 하오처럼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고, 서로를 구독하며, 함께 성장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도 충분히 아름다고 소중할 거예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어서 편집자로서 참 기뻤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우리 모두는 구독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