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2025년 수림뉴웨이브 '결: 예술가의 시간'
정마리〈Kairos, 소리의 층위〉공연 리뷰
관객의 위치를 찾아서: 자기 수양 무대에서의 관객성 탐색
기실, 전통음악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하나는 ‘관객’이라는 명확한 대상을 전제한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훈련의 결과를 발표하는 공연이다. 후자의 경우, 관객의 해석이나 감상은 주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공연의 목적 자체가 연주자의 ‘성장’에 있기 때문이다. 지인과 동료, 가족들이 공연장을 찾는 이유 또한 그의 도전과 실천을 응원하기 위함이며, 이러한 방문은 공연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루어진다.
정마리의 무대는 자기 훈련을 넘어 자기 수양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무반주로 전통 가곡과 그레고리오 성가를 60분간 이어가는 이 무대는, 국내에서 정마리만이 시도할 수 있는 레퍼토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분 동안 쉼 없이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도전인데, 그는 가곡과 성가를 오가며 관객을 하나의 수양의 장으로 초대한다.
이 공연은 제목 그대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소리의 ‘층위’를 보여준다. 정마리가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가곡은 음악적으로는 분명히 다른 계보에 놓여 있지만, 창법의 층위에서는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의 노래 방식은 각 장르가 요구하는 전형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 성가를 부를 때도 서양 성악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벨칸토(bel canto) 창법을 택하지 않고, 가곡 역시 정가 전공자들이 강조하는 전형적인 ‘성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오롯이 ‘정마리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이 선택은 그의 노래가 지닌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60분 동안 창법의 대비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음악을, 더구나 같은 포먼트에 위치한 여성의 고음을 지속적으로 듣는 일은 관객에게 분명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정마리는 이 과감한 선택과 실행을 통해 자기 예술, 혹은 자기 수양의 지평을 확장해 나간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이자 가창자인 정마리에게 있어 중요한 도전이자 의미 있는 시도로 읽힌다.
그러나 질문은 자연스럽게 관객의 자리로 이동한다. 관객은 이 공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이 음악은 어떤 태도로 감상해야 했을까. 솔직히 말해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이 기획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60분간 무반주로 진행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라틴어 성가와 그 사이에 배치된 가곡들. 어떤 측면에서는 관객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여지도 있는 구성이다. 예술가의 ‘결’을 보여주겠다는 수림뉴웨이브의 취지와는 맞닿아 있을지 모르나, 관객을 염두에 둔 공연 기획이라는 최소한의 태도는 충분히 고민되었는지 묻게 된다. 친절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안내’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 공연에서 관객은 어떤 존재로 상정되었는가. 자기 훈련의 발표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유형의 공연과 유사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관객의 위치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에 오른 이미지들의 모호함 또한 공연 해석을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기생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한복 의상은 공연의 음악적 내용과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음향, 조명, 영상, 오브제 역시 뚜렷한 연출 의도가 읽히지 않았다. 무대 위에 놓인 물질들은 각자의 의도를 품고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그러한 조율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무대 연출은 음악만큼이나 공연의 의미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 기획이 지속된다면, 정마리의 음악 세계를 관객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무대적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앞선 비판과는 정반대의 질문도 가능하다. 이 공연은 애초에 ‘근대적 인간’의 감상법을 벗어난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공연의 기본 문법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관객에게 특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직 ‘소리’라는 근원적 요소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 그렇다면 이 공연 앞에서 이루어지는 비평 행위 자체가 어쩌면 무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이른다.
비평은 사고하는 근대적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해 예술을 언어로 포획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무형의 음악과 공연을 유형의 글로 치환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잔여’가 남는다. 이 글 역시 그러하다. 이미 지나가 되돌릴 수 없는 순간, 끝내 언어화되지 못한 잔여는 글 바깥에 머문다. 잔여가 많이 남는 음악과 공연일수록 반복과 축적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정마리의 행보는 바로 그 한복판에 있다. 그가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계속 펼쳐나가기를, 비평의 성찰을 동반한 이 글을 통해 응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