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보이지 않음으로 구성된 음악

글쓴이 소개
백소망

음악그룹 아마씨에서 노래를 짓고, 부른다. 이따금 전통공연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공연을 만드는 일에 애정을 쏟고 있다.
  • 내용
    2025년 수림뉴웨이브 '결: 예술가의 시간'
    이슬기〈시간, 보이지 않는〉공연 리뷰
     

    보이지 않음으로 구성된 음악: 
    이슬기 <시간, 보이지 않는> 수림뉴웨이브 리뷰


    다른 장르와 달리 어린 나이부터 학습을 시작하는 ‘전통음악’은 성장에 있어 몇 가지 필수조건을 전제로 한다. 첫째는 물리적인 시간이며, 둘째는 의지적으로 발휘해야 하는 성실, 그리고 인내다. 전통음악 연주자는 이 조건 위에서 성장하며, 그의 음악 역시 함께 자란다. 오늘 공연의 주인공 이슬기는 운이 좋게도 이 세 요소를 두루 쌓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빚어진 가야금 연주자라 할 수 있다. 가야금 명인인 어머니 문재숙 아래에서 가야금을 삶의 동반자로 삼게 된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본 공연은 이슬기가 축적해 온 시간의 궤적을 따라 구성되었다. 시간은 가시화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쌓인’ 시간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슬기의 공연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고 듣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에서는 어머니 문재숙으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죽파제 뒷풍류: 계면, 양청, 우조, 굿거리〉, 음악 인생 전반에 걸쳐 연마해 온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자신이 쓴 가야금병창 곡 〈편지〉, 그리고 이번 공연을 위해 새롭게 구성한 〈이슬기제 허튼가락: 시간, 보이지 않는〉이 연이어 연주되었다. 60분간의 공연은 ‘이슬기’라는 전통음악가의 ‘결’을 여실히 드러낸 무대였으며, 예술가의 ‘결’을 주제로 한 이번 수림뉴웨이브의 기획 의도와도 잘 맞닿아 있었다. 

    문재숙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죽파제 뒷풍류〉를 이슬기는 훈, 글로켄슈필이라는 다소 생소한 악기와 함께 연주했다. 풍류음악의 속성을 생각할 때, 의아한 선택이었다. 훈은 관악기지만 대금, 피리와 같은 풍부한 시김새를 구현하기 어렵고, 글로켄슈필이 양금의 역할을 대체하기에는 음색이 지나치게 도드라진다. 특히 글로켄슈필과 국악기들의 음정 불일치는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글로켄슈필은 고정된 음을 연주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함께 연주할 경우 다른 악기들이 그 음정에 맞춰야 한다. 풍류음악이 산조처럼 깊은 농현과 농음을 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훈과 글로켄슈필이 가야금과 함께 ‘풍류’의 질감을 형성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슬기의 가야금병창 〈편지〉는 기존 소리 전공자들이 하는 가야금병창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가야금의 운용에 있어 노래가 지나가는 음을 뜯는 것이 아닌, 노래의 자리를 충분히 확보한 뒤 간주 형태로 가야금 연주가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노래와 가야금은 분리되지 않았고, 목소리가 노래하면 가야금이 다시 노래로 응답하는 구조로 느껴졌다. 이슬기의 음색은 가사와 선율,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으며, 국악성악의 전형적인 창법을 모방하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래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 공연에서 이슬기의 음악성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지점은 단연 ‘산조’였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에서는 셀 수 없이 반복된 연습과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그의 공력이 전면에 드러났다. 다만, 이 산조의 완급을 온전히 받쳐주기에는 고수와의 호흡이 다소 아쉬웠다. 이는 고수가 연주자의 호흡을 세밀하게 따라가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슬기가 직접 짠 〈허튼가락〉은 그의 음악적 내공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이틀 만에 쏟아진 가락을 모아 구성했다는 이 곡은, 그간 이슬기가 학습하고 체화해 온 음악의 총합에 가까웠다. 돋보이는 저음 활용, 과감한 장단 운용, 하모닉스 등 다양한 요소가 ‘산조’라는 형식 안에서 매끄럽게 연결되었다. 이는 이슬기의 몸에 새겨진 완급과 밀도,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제자리를 찾은 결과였다. 이 〈허튼가락〉이 이슬기의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 흩어져 있던 것들을 일단 모아 놓은 단계라면, 완성된 이슬기의 가야금산조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이 공연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건 이슬기의 몸과 가야금이라는 물질의 관계였다. 음악으로 드러나는 그의 ‘성음’은 마치 가야금과 연주자의 신체가 한 몸을 이룬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가야금은 그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몸의 일부처럼 보였고, 그의 연주는 나무로 된 악기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되는 울림에 가까웠다. 이는 ‘음악하기’에 있어 연주자의 몸과 악기라는 물질의 ‘관계맺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일일이 계수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몸과 같은 악기와 분투해 온 연주자의 신체는 개인 고유의 무늬와도 같은 ‘성음’을 만들어 낸다. 이슬기의 무늬, 그의 성음은 편안하면서도 특별했다. 이 특별함은 단순히 연주를 잘한다는 차원보다는, 삶의 궤적 속에서 빚어진 결과에 가깝다. 무대와 음악은 연주자와 그의 삶을 드러내는 정직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산조를 만들어가는 흐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산조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산조를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권력화하고, 오히려 전통음악이 새롭게 생성될 가능성을 제한한다. 한편으로, 산조는 분명 ‘시간’을 먹고 자라 완성되는 음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젊은 산조’라고 불리는 음악을 섣불리 폐기할 필요는 없다. 그 〈허튼가락〉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가, 또다시 흩어지는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산조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동시에, 그 시간을 따라 끊임없이 편곡되는 음악이다. 이 세계에서 더 좋고, 다양한 형태의 ‘산조’가 많아지려면, 이러한 산조의 ‘형성’이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허용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산조를 구축하는 연주자가 많아진다면, 오늘날 이슬기의 〈허튼가락〉과 같은, 완성될 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산조’가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결실’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맺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과 의지, 인내, 결심, 슬픔, 좌절, 고통, 환희, 기쁨 …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 구성하고 해체하고, 한발 앞서 가다가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힘을 내었다가 다시금 주저앉고, 그러다 어느새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들. 결국 산조, 개인 고유의 결을 지닌 음악이란 이러한 것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물질일 것이다. 각각의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다양한 무형의 물질들로 이루어진 음악이 이 세계에 더욱 만연해졌으면 한다. 그러니까 이슬기의 〈허튼가락〉은 이 아름다움의 형성에 충분히 기여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