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과밀하게 침범하는

글쓴이 소개
성혜인 (음악평론가)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다. 음악과 공연예술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강의, 방송, 자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 내용
    2025년 수림뉴웨이브 '결: 예술가의 시간'
    서정민 〈담양에서 온 소리〉 공연 리뷰
     

    과밀하게 침범하는: 서정민 〈담양에서 온 소리〉를 돌아보며

    서정민은 일관되게 자신이 목격한 것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기록해 왔다. 2016년 발표된 〈Cosmos 25〉부터 〈HOME〉, 〈YOUtopia〉, 〈SWIMMING〉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은 언제나 작은 정서에 밀착되어 있었다. 자연의 표정과 일상의 기척, 발밑의 풍경처럼 거대한 관념이 아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책임질 수 있는 구체적 세계가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과 음악적 궤적을 분리할 수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는 2025 수림뉴웨이브에서 선보인 〈담양에서 온 소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담양’이라는 공간을 명시적으로 호명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서정민은 전라도로 활동 거점을 옮기면서 경험했던 내밀한 시간을 무대 위로 옮겨 온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음악의 재료로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고유한 감정과 서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수림뉴웨이브의 대주제인 ‘결’에 응답한다.

    서정민처럼 작은 일상의 경험을 음악의 출발점으로 삼고, 종종 협연을 하지만 대체로 솔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음악가에게 관성적으로 따라붙는 고정관념은 가령 이런 것일 테다. 25현 가야금만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극도로 미니멀한 악기 구성을 선호하는 음악가에게 ‘꾸밈없는 진실성’이나 ‘날 것의 진정성’과 같은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단일 악기에 대한 이러한 기대—가공되지 않은 소리로 내면의 본질에 가까운 순도의 진정성을 구현할 것이라는 믿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편향이다. 게다가 그 악기가 비서구권의 어쿠스틱 악기일 경우, ‘진정성’을 둘러싼 이미지는 종종 과도하게 비약한다.

    그런데 정작 서정민의 음악은 소박하거나 담백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감정의 진폭을 즉각적으로 만들어 내는 전형적인 서정성에도 기대지 않고, 절제된 형식과 여백을 전면화하지도 않는다. 그의 음악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과밀하게 집적된 정보나 과잉된 운동성으로 인한 ‘포화’의 감각이 선연하게 감지된다. 그는 오직 한 대의 25현 가야금만으로 패턴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점진적인 고조를 만들어 내며 타악기 없이도 음악의 다이내믹을 탁월하게 조절한다. 서정민의 음악적 힘은 ‘날 것’을 위한 형식적 절제나 의도적 감속이 아닌 정밀하게 계산된 추진력과 가속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비움이나 성찰, 본질 같은 단어를 관성적으로 부착해 정서적 깊이로 모든 음악적 힘을 환원하는 비평의 언어가 서정민에게도 과연 유효한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첫 곡이었던 〈먼동이 틀 무렵〉은 한 대의 25현 가야금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너지를 극명히 드러낸다. 엄지로 현을 쓸고 같은 주법을 현의 위치를 옮기거나 템포, 강도를 달리해 반복적인 타격감을 배치하는 등 양손으로 만들어 내는 선율은 자주 리듬과 등치되며 음악 전체에 압력을 가한다. 25현 가야금이라는 주어진 ‘한계’가 창작의 주요한 ‘조건’이자 ‘동력’으로 작용하며 음악의 긴장과 밀도를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3집 수록곡인 〈호랑가시나무〉에 김용성의 〈터벌림〉을 엮은 〈물들 다스름 – 호랑무〉는 한층 여유롭고 명료한 정서를 지니면서도 화성적 변화와 멜로디의 방향성이 뚜렷하게 감지되는 곡이다. 에너지의 흐름이 전환된 듯한 이 곡엔 유일하게 박수정의 안무가 병치되는데, ‘다스름’이라는 형식으로부터 비롯되는 비정형성이나 자유로움, 감정적 여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에너지의 전환 속에서도 음악은 여전히 밀도를 점진적으로 높여 가는데, 박수정의 움직임은 느슨한 호흡으로 대응하며 전반적으로 정제된 인상을 남긴 셈이다.

    25현 가야금의 과잉된 면면은 이후 곡들에서도 이어진다. 비파 연주자인 대만예술학교의 수윤한과 함께 작업한 〈산, 山〉이나 〈SWIMMING〉은 제목이 환기하는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며 서정민 고유의 탄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번 공연에서는 솔로 버전을 선보였지만, 비파의 트레몰로를 조명하거나 대적할 수 있는 속도감 있는 치밀한 공세는 여전하다. 산이 주는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이미지를 장면이 전환되듯 그려내는 방식이나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중중모리 장단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짧고 또렷한 어택과 맑게 퍼지는 여음을 강조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음향적 효과를 의도하는 접근에서도 이러한 면면이 쉽게 발견된다. 이번 공연의 제목이기도 한 〈담양에서 온 소리〉도 비슷한 궤에 놓여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에게 25현 가야금이라는 조건은 제약이라기보다 도리어 하나의 자원이다. 그는 악기의 신체적 속성을 침범하면서 하나의 악기에 내재된 음악적 관습을 능청스럽게 넓힌다. 표면적으로 25현 가야금이라는 간결한 악기 구성을 취하지만, 다양한 주법의 동원, 의도적인 가속, 패턴의 반복을 통한 음향적 효과를 딛고 격렬한 운동성을 전면화하는 미학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의 에너지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단일 악기의 연주를 내밀함이나 절제의 영역에 고정시키며 ‘진정성’이라는 코드로 독해하는 일련의 규범도 균열을 맞이한다. 

    결과적으로 악기의 신체적·물질적 경계를 흔드는 과잉된 제스처로 음악을 조형한다는 점에서 서정민의 25현 가야금은 그 자체로 음악가의 서명(signature)이 된다. 서정민에게 25현 가야금이 그토록 밀착된 느낌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모든 팽창이 악기 내부에서 압축적으로 일어날 때 그곳에서 악기와 음악가에게 동기화된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전통적 음역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 서양악기를 대체하려는 시도, 새로운 주법에 대한 탐구까지. 낯선 가능성을 위해 애써온 국악계의 역사를 ‘확장’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때 그리 과한 부분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자주 폭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제 맹렬한 확장은 하나의 악기와 음악가 개인의 신체를 교활하게 침범하거나 초과하고 있는 것일까? 확장과 과밀, 과잉의 감각은 역사적 압력과 닮아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대적 미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