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용해(溶解) 이후의 형식

글쓴이 소개
성혜인(음악평론가)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다. 음악과 공연예술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강의, 방송, 자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 내용
    소금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이자 부패를 방지하는 물질이며 ‘salary(급여)’라는 단어의 어원일 만큼 노동의 역사와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왔다. 소금은 몸을 기능하게 만드는 생리적 조건이자 삶을 지탱하는 물질적 조건으로 오랜 기간 각인되어 온 것이다. 권송희는 “존재와 소멸의 경계”에 놓여 있는 소금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결정, 물에 녹은 상태, 땀과 눈물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본질은 유지되는 소금의 속성을 빌려 자신의 음악적 지향을 드러낸다.

    권송희의 〈소금〉에서 핵심으로 다가온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소금이 지닌 가변적인 속성이 무대의 언어로 번역되는 방식을 살피는 것이었다. 〈소금〉의 근간에는 변화하는 권송희의 음악적 정체성이 놓여 있긴 했으나, 보편적인 공연 관습을 어수선하게 만들려는 계획도 함께 감지 됐기 때문이다. 2025 수림뉴웨이브에서 내세운 ‘결’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표면적으론 자신의 음악 궤적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전통음악을 전달하는 보편적 형식을 흐트러뜨리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공연은 스승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던 어린 시절의 육성을 무대 위로 호출하며 ‘작품 이전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음악가로서의 생애를 선형적으로 배열하기 위해 시작점을 좌표로 찍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작품이라는 ‘완성’된 시간에 작은 틈새를 만들어 ‘과정’으로서의 현재를 재생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스승과의 시간을 호출함으로써 그의 음악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과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열화된 샘플링 사운드와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무대 위 육성을 극적으로 전면화하는 전략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 Play〉가 작품의 시간에 균열을 일으켰다면, 〈화초사거리〉는 음향적 효과를 통해 감각의 밀도를 높인다. 보편적인 공연 관습과 달리 고수는 객석 마지막 열 출입구 쪽에 자리했고, 권송희는 무대가 아닌 객석을 배회하며 노래한다. 더불어 객석 마지막 열에 일렬로 앉은 퍼포머들이 〈화초사거리〉를 함께 부르며 ‘떼창’으로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관객은 지속적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며 청각적 압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석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청취 경험을 하게 되는 이러한 배치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식의 평가로 곧장 이어지진 않는다. 코러스 역할을 맡은 퍼포머들의 위치가 고정된 채 별도의 음향적 장치나 왜곡 없이 합창의 골격을 형성하는 동안 권송희는 무대와 객석을 배회하는데, 퍼포머들의 목소리가 권송희의 목소리의 볼륨을 초과해 버린다. 즉, 퍼포머들의 배치와 이동이라는 전략에서 기대하게 되는 음향적 밸런스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이후 두 번째로 떠오른 핵심 과제는 권송희의 관심이 변화 자체를 보여주는 데 있는지, 혹은 변화 이후에도 소거되지 않는 것에 있는지였다. 〈둥덩애환〉이나 〈달 넘세〉를 통해 여성의 삶을 그려내고,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인도네시아 전통 인형극 와양 예술가 JOKO의 목소리를 불러오는 등 그는 자신의 삶과 밀착된, 그러나 자기 고백적이라기보다 여러 매개를 거쳐 정돈된 정서의 음악을 무대 위로 옮겨온다. 이와 더불어 전자음악과의 결합을 본격화하며 자연스럽게 두 번째 과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연의 마지막까지 정중업의 신시사이저에 권송희의 보컬이 덧대지는 예견된 형식을 이어가는데, 두 음악가의 사운드는 위계 없이 병치된다. 정중업의 사운드가 물러서지도 권송희의 보컬이 전면화되지도 않으며 적절한 평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 평형은 서로가 서로를 변형시키는 개입, 충돌, 흡수를 통해 완성되기보다 각자의 시간을 유지하는 선에서 멈춘다. 두 음악가의 음악적 질료가 다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전자음악을 덜어내더라도 음악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재편되지 않으며, 전자음악이 다른 음악으로 대체된다 해도 음악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음악은 음악을 성립하게 하는 요소라기보다 음향적 텍스처로서 강하게 의미화되는 것이다.

    음악을 나열하기보다 공연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엮어내는 감각, 음악의 뉘앙스에 따라 가창의 방식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태도는 분명 권송희의 덕목이다. 곡마다 다른 결을 취하고, 장면마다 온도를 달리하면서 하나의 공연으로 이끌어 가는 숙련된 힘도 돋보인다. 그러나 전자음악이라는 재료의 ‘유’와 ‘무’를 두루 고려해 보면, 공연 속 음악은 권송희의 고유한 색채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보다 그 정체를 포착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기운다. 상투적인 화성적 접근에서 벗어나 음향적 분위기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전자음악을 사용하는 제스처는 분명히 감지되지만 그 변화들 속에서 무엇이 지속되고 있는지는 끝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정체성의 쇄신을 꾀한 음악을 듣다 보면 ‘용해 이후에 무엇이 남는가’ 라는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꽤 오래 누적되어 온 창작의 시간을 떠올린다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특히 판소리, 민요, 정가 등 보컬리스트로 출발한 음악가가 ‘창작’이라는 장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곤경이기도 하다. 새로운 음악을 한다는 말이 곧 다른 음악가와의 협업을 뜻하게 된 지금,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새롭게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끝내 붙들고 있는가’를 더 집요하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용해는 목적이 아니라, 이후를 발명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