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일곱 빛깔의 침묵, 무지개의 악보: ‘무성음악(無聲音樂)’ 향유하기

글쓴이 소개
김효은(金曉垠)

목포 출생.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2010 계간 《시에》 평론 등단. 비평집으로 『아리아드네의 비평』 『비익조의 시학』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 등이 있음. 현 경희대, 서울과기대 출강,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 내용
    2025 수림북클럽 선정도서
    이릉 『무성음악』 리뷰
     

      이어폰 줄이 두 개인 이유는 귀가 두 개라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이 음악을 같이 듣기 위해서라고 마음대로 규정해 본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고 불구덩이라 당장 뛰쳐나가고 싶을 때, 눈앞이 막장이고 발밑이 수렁이라 이보다 더 깊은 절망은 없을 것 같을 때, 우리는 묻는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음악이 없는 삶, 문학이 없는 삶이 아닐까. 음악과 문학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음악과 문학이 있어, 지리멸렬한 이번 생에 대해 마음은 이내 관대해지고 만다. 고통도 치욕도 가난도 견딜 만한 것으로 치환하고 위무해 버리는 이 신비한 최면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일산 백병원 내과계 중환자실은 건물의 최상층인 12층에 있다. 고단했을 영혼이 하늘로 가는 길, 그 발걸음 조금이라도 수월하라고 가장 높은 곳에 배치한 배려일까. 반면 안치실이나 장례식장은 대개 지하 깊숙한 곳에 있다. 육신은 마땅히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지독히 합리적인 배치가 아닐 수 없다. 공학도의 계산된 효율일지 모르나, 필자에게는 삶과 죽음의 동선을 배려한 지극히 감성적인 설계로 읽혔다. (실제로 이 층별 배치도를 보며 「설계도」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2년 전, 생사의 기로에 선 가족을 그 12층에 두고 상주 간병을 하던 나날이 있었다. 주치의는 연명치료 의향을 재차 물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다. 창밖의 십자가를 이정표 삼아 손조차 모으지 못한 채 묵상기도만 올리던 날들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생애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두 겹의 무지개’를 발견했다.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365일 굳건히 서 있는 십자가보다, 그 찰나의 순간 하늘을 수놓은 무지개가 준 위로는 형언할 수 없이 경이로웠다. 물성의 십자가나 잠언 구절보다 말 없는 자연이 건넨 침묵의 언어가 더 깊은 구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소리 없이 나를 압도한 내 인생 최고의 ‘무성음악(無聲音樂)’이었다.

      이제 그 찬연했던 희망을 닮은 또 하나의 무지개를 당신 앞에 펼치려 한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로 이어진 아름다운 무지개. 작가들마다 보여주고 들려주는 빛깔과 음악들이 다르다. 빨강부터 보라에 이르기까지, 빛은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공중을 점유하지만 그 어떤 음향도 내뱉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고요한 띠를 응시하는 당신의 내면에서는 분명 이미 격정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빛의 굴절이 망막을 통과하고 소리의 파동이 영혼의 고막을 두드리는 순간, 색채는 음계가 되고 검은 절망은 다채롭고 영롱한 악보가 된다. 7인 7색의 음악이 담긴 이토록 귀한 앨범이라니. 재생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제목부터 감상하면 된다. 필자는 이 소설들에 어울리는 색깔들을 자의적으로 매칭해 보았고, 색과 빛과 음에 관한 단상으로써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 붉은 선율 : 오선호, 〈진통제〉
    그의 소설은 선명한 붉은색 선율로 격정적으로 흐른다. 누군가에게는 타오르는 갈증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실의 비명으로 들릴 검붉은 고강도의 음향. 고막을 터뜨릴 듯 강렬한 메탈 음악은 고통을 고통으로 상쇄하는 가장 뜨거운 진통제가 된다. 때로는 잔잔한 위로보다 생의 진폭보다 큰 파장의 치열한 비트가 절실한 법이다. 주인공 승선이 스스로를 유폐해 온 것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승선 자신에게는 무의식의 그림자이자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대한 회한이기도 한 ‘문주’의 사적 공간으로 승선이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행위는, 오랜 세월 자신을 억압하던 검열을 비로소 해제하고 화해와 설렘을 허락하는 용기 있는 첫걸음으로 읽혔다. 승선과 상현의 관계 역시 ‘그린라이트’가 아닐까?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여주고 잠시나마 진통제가 되어줄 수 있다면, 설령 약효가 영원하지 않더라도 그 찰나의 음역대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 핏빛보다 슬픈 주홍빛 선율 : 김수영, 〈탱글우드〉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자’가 언급되듯 이 소설은 주홍빛 통증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빨간 체리처럼 무르익지도, 노란 레몬처럼 상큼할 수도 없다.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웃을 때조차 입을 벌릴 수 없는, 속으로만 익어가다 곪을 대로 곪아버린 체념의 사랑. 구멍 뚫린 빛의 구멍 속으로 그(탁진)는 이제 떠나고 없다. 어떤 고통은 드러낼 수 없다. 은폐와 인내를 거듭하다 어느 순간 대포처럼 터져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바다에 가자”는 탁진의 말에 우언이 대꾸해 주었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대포 소리와 빗소리, 주홍빛 상흔과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에 대한 회오가 뒤섞인 밤,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흐른다. 장례식장에서 흐르는 음악이라니. 무성음악을 들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고인이 차려주는 마지막 식사, 그렇게 주홍빛 육개장을 싹싹 비우고 다시 기운을 내서 전장으로 나가야겠지. 

    * 노란색 저음 : 원초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지독한 샛노란 슬픔이다. 음계로 따지면 가장 밑바닥의 저음이랄까. 삶의 막장에서 마주하는 죽음 충동과 막연한 배회들의 어울림이다. 너무나 선명하게 밝은 노란색은 고독하다. 소설 속 세 사람을 보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린다. 포장마차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함께 여인숙에 들어가고, 그중 한 사람의 죽음을 방조하고 흩어졌던 두 사람, 그 인물들과는 달리, 이들은 함께 바다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음악 듣기 또한 멈추지 않는다. 서해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석양을 마주한 세 남자. 죽음을 방기하는 대신 이들이 서로 어깨를 다독이며 생을 연장해 나가기를, 음악처럼 생도 유유히 계속해서 흘러가기를 기도하게 된다. 유무형의 유서를 써두고 나온 그들이지만, 노란색은 집으로의 귀환, 희망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먹구름을 뒤로한 채 쫓기면서 달리는 차보다 그들이 탄 택시는 얼마나 희망적인가. 먹구름을 뚫고 안온한 빛 속으로, 모두의 안전 귀가를 기원한다.  

    * 초록과 파랑, 쿨톤 혈관 : 박이강, 〈하필이면 다행이도〉
    초록과 파랑과 보라가 뒤섞인 멍의 색감, 혹은 몽고반점 같은 연푸른색의 얼룩 또는 어우러기 같은 소설이다. 피부 위로 비치는 혈관의 색이 푸르듯,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찾아 나선 경주 여행은 이상하게 얽힌 혈연의 차갑고도 푸른 굴레, 어쩌면 닮은 꼴의 묘한 두 개의 무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당신이 내 아버지다’, 또는 ‘내가 니 아비다’라고 외치는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혈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서늘한 쿨톤의 푸른 음악이 연신 흐른다. 게다가 소설 속 그녀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안심이 되고 더 다행인 것도 사실이다. 멋진 소설, 또는 근사한 시나리오를 곧 완성하게 되리라 믿는다. 하여 언젠가 오늘의 결정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라 그녀 역시도 믿게 되길! 

    * 겨울, 속초 바다의 색과 음 : 도수영, 〈겨울바다에 다녀오다〉
      “한심해질 나를 구해야 한다.” 주희가 외면해 왔던 현실은 검은색이다. 짐짓 모르는 척해왔던 관계의 이면들, 그리고 스스로 자초한 지리멸렬한 일상과 관계와 불행. 그런 그녀가 떠난 속초 여행에서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본다. 그들 셋의 환한 웃음소리, 소리가 없어도 관객은 파도 소리며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특히 주희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박동 소리까지도. 그들의 삶은 아직 지나치게 젊고 푸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속 은수를 떠올리며, 주희가 새로운 사랑을 향해 지긋지긋한 터미널 로비에서 가급적 멀리 떠나길 바란다. 상우를 만나 함께 떠나도 좋겠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해도 좋다. 그 떠남은 충분히 아름다운 시작이 될 것이다.

    * 흰색, 눈부신 악마의 색깔 : 〈이릉의 악인(樂人) 열전 Ⅰ: 째즈마스터 조풍각〉
      지나친 흰색은 외려 눈을 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는 가장 눈부신 순백의 색깔을 하고 있지 않을까. 수면내시경 때 보았던 프로포폴의 뽀얀 주사액처럼, 누군가에게는 음악도 때로는 마취제이자 마약이 된다. 도피와 중독과 환각 속에서 조풍각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흰 마약을 손에 넣는다. 마약의 촛대가 타오를수록 수명은 닳아가지만, 그 거대한 불꽃은 누군가에게도 탈출구가 도피처가 진통제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들도 공모자이자 공범자인 것. 죽어가는 순간에 틀어놓고 싶은 단 하나의 곡이 당신에게도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 당신이 조합한 기묘한 어떤 색 : 안덕희, 〈귀파기〉
      무지개가 아니라 귀지의 색깔이면 어떠한가. 현란한 음악이 아니라 귀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면 또 어떠한가. 시원하고 개운하면 그걸로 된 거다. 필자에게 이 소설은 고막 깊숙한 곳까지 전달, 각인되어 버렸다. 앞으로 귀를 팔 때마다 안덕희의 이 소설이 생각날 것 같다. 글쟁이에게 글쓰기란 곧 고통과 희열이 함께 있는 “귀파기”가 아닐까. 백지의 공포 위에 작품을 완성하는 그 지독한 중독성, 반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야?”(210쪽)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 작은 에필로그
      무지개의 각 색깔이 소리 없는 음향이 되어 의식을 파고들 때, 소설은 더 이상 타인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음악이 된다. 기억의 서랍을 열고 낡은 LP를 꺼내 사유화된 추억을 재생한다. 무지개가 떴다. 때론 붉은 문장에서 선혈이 떨어져도, 하얀 문장의 연고를 펴 바르면 통증은 진정될 것이다. 일곱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일곱 빛깔의 침묵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가 되는 일이다. 무채색의 텍스트 위에 각자의 기억을 덧입혀 ‘나만의 무성음악’을 완성하는 과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나 역시 그 과정 속에서 행복했다. 그날 12층 창가에서 바라본 그 무지개를 『무성음악』이라는 표지를 두른 작은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선물한다. 책 속 오르골이 사뭇,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