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글쓴이 소개
이택광

문화예술평론가
  • 내용
    AVS: 도파민하이프 전시 평론
     

    동시대 미술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 방식이 과학기술의 도입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20세기 이후 두드러진 경향일 것이다. 물론 모더니즘의 발흥 자체가 과학적인 인식과 함께 이루어진 기술의 발전에서 기인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상주의가 광학 이론과 조우하고, 구성주의가 산업 생산의 논리를 캔버스 위로 끌어들인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이 과학적 세계관의 재편에 능동적으로 반응했다는 역사적 증거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사실상 그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 전자가 세계의 원리를 해명하려는 순수한 인식의 충동에 가깝다면, 후자는 그 인식을 도구화하여 세계를 변환하려는 실천적 욕망에 속한다. 이 두 동력이 한몸이 되어 “테크노사이언스”가 새로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20세기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결합이 아니라, 앎의 형식과 변환의 형식이 서로를 정당화하는 순환 구조의 출현이었다. 브뤼노 라투르가 지적했듯, 테크노사이언스의 세계에서 자연과 사회, 사실과 인공물의 경계는 점점 더 불투명해진다.

    동시대 미술은 이런 상황에 대한 꾸준한 개입을 보여왔다. 그 개입은 종종 찬미나 비판의 외피를 두르지 않은 채, 주어진 패러다임의 틈새에 조용히 파고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김희수 아트센터에서 2025년 12월 5일부터 2026년 4월 4일까지 전시한 〈도파민 하이프〉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평소에 정상적이라고 믿는 어떤 과학적인 패러다임에 개입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과거 전시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전시 역시 과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특징은 충분히 관심을 끌 만했다. 협업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주장이다. 그것은 과학적 언어와 예술적 언어 사이의 위계를 허물고, 각각이 상대방의 맹점을 드러내는 상호 비판의 장을 예비하는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전시의 주제는 “도파민”이지만, “도파민 하이프”라는 변형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정확히 이 전시는 “도파민 환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현 세태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도파민이 쾌락과 동기, 중독과 보상의 만능 설명자로 대중화되는 현상, 이것이야말로 테크노사이언스적 환원의 가장 친밀한 일상적 형태다. 어떻게 보면, “도파민 중독”을 표현하는 것이 전시를 잡아주는 중력인 셈이다. 그러나 전시가 단순히 이 중독을 고발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도덕주의적 내러티브에 불과할 것이다. 전시의 힘은 그보다 더 복잡한 곳에서 온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이렇게 정해진 결승점을 향해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진형제의 〈긍지의 날〉과 업체eobchae-최상국 협업이 보여주는 〈Gozo〉는 넘어설 수 없는 협곡을 마주하고 있다. 전자가 무한반복의 지루함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차이를 참을성 있게 드러낸다면, 후자는 신기술이 초래하는 현실의 변화에 신속하게 개입하는 예민함을 보여준다. 〈긍지의 날〉의 반복은 의식(儀式)과 습관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것은 수행의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반복을 통해 매번 미세하게 어긋나는 지점, 반복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시화한다. 얼핏 보면, 〈긍지의 날〉에서 드러나는 반복은 〈Gozo〉에서 거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반복은 〈Gozo〉에서 “첨단 기술”의 복선으로 등장한다. 기술 역시 반복한다. 알고리즘은 반복하고, 드론은 같은 궤적을 반복하며, 훈련 데이터는 같은 패턴을 반복 학습한다. 〈Gozo〉에서 기술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기제이다. 그러나 이 가상현실은 전쟁을 통해 현실화한다. 시뮬레이션이 실전이 되고, 게임의 인터페이스가 살상의 인터페이스가 되는 것이다. 특히 〈Gozo〉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어떻게 기술이 이 현실로 바뀌는지 보여준다. 드론 전쟁, FPV 카메라의 시점, 민간 기술의 군사적 전용, 이것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빠르게 붕괴하는지를 증언한다.

    전쟁은 “힘”(force)의 경합이다. 이 명제를 가장 정밀하게 사유한 사람 중 하나는 시몬 베유(Simone Weil)다. 1940년에서 1941년 사이에 집필된 에세이 「일리아스, 혹은 힘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에서 베유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힘의 현상학으로 읽는다. 베유에게 힘이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를 사물로 전환시키는 능력, 곧 인격을 탈각시키고 생명을 순수한 물질로 환원하는 작용이다. 힘에 완전히 노출된 자는 사물이 되고, 힘을 완전히 행사하는 자 역시 결국 사물화의 논리에 포획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신을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지만, 베유의 독해에서 그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운명, 곧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사물이기도 하다. 힘의 논리는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주주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평등하게 고양시키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평등하게 사물화하는 민주주의다.

    이 통찰은 〈Gozo〉가 보여주는 전쟁의 풍경과 정확하게 공명한다. FPV 드론의 시점에서 포착된 전장의 이미지는 베유가 분석한 일리아스의 구조를 21세기적 형식으로 반복한다. 드론은 조종사의 주관적 시선을 보존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표적,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을 스크린 위의 좌표로, 제거되어야 할 픽셀의 집합으로 변환한다. 기술은 사물화를 가속한다. 그것은 힘의 작용을 더 효율적으로, 더 원거리에서, 더 추상적으로 수행하게 만든다. 조종사는 물리적으로 전장 밖에 있지만, 베유적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힘의 연쇄 안에 포획되어 있다. 사물화하는 자 역시 사물화된다. 다만 그 형식이 달라질 뿐이다. 〈Gozo〉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참조점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에 단순한 시사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베유가 일리아스에서 읽어낸 힘의 구조가 테크노사이언스의 시대에 어떤 새로운 외피를 두르고 재현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전시 전체의 주제, 도파민 환원주의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베유의 힘이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면, 도파민 환원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과 판단을 신경화학적 변수로 만든다. 양자는 모두 환원의 논리를 통해 작동한다. 전자가 몸을 전장의 질료로 삼는다면, 후자는 마음을 알고리즘의 입력값으로 삼는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환원이 완성되는 순간 저항의 거점은 사라진다. 〈도파민 하이프〉가 던지는 물음은 결국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환원의 논리 아래 살고 있으며, 그 논리가 우리의 감각과 욕망과 연대를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가. 베유는 일리아스가 위대한 이유로 힘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힘에 의해 파괴되는 것들, 말하자면, 사랑, 우정, 인격의 존엄을 애도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술의 개입은 이 애도의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정상성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속에서 환원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들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가시화한다.

    〈긍지의 날〉은 바로 이 애도의 반복 재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을 향한 감상적 회고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이다. 반복 자체가 애도의 형식이다. 무언가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혹은 끝나야 했지만 끝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반복은 완결을 거부하는 몸짓이며, 바로 그 거부 안에 상실한 것에 대한 집요한 기억이 깃든다.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를 구분했을 때 그가 포착한 것도 이것이었다. 애도가 상실을 처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멜랑콜리는 그 처리를 완수하지 못한 채 반복에 머무는 상태다. 〈긍지의 날〉의 반복은 이 멜랑콜리적 구조를 의도적으로 전시한다. 그것은 병리로서가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반복은 공백의 위치이다. 그러나 이 공백을 단순한 결여로 읽어서는 안 된다. 공백은 비어 있는 지점이 아니라, 그렇기에 무엇이든 가능한 꽉 찬 시간의 팽창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현상학적 사실이다. 반복의 순간들 사이에 놓인 간격행위와 행위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이 응축된 시간이다. 베르그손이 지속(durée)의 개념으로 포착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시간은 균질한 점들의 연속이 아니라, 질적으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살아 있는 흐름이다. 무진형제의 작업은 이 팽창하는 지속을 이미지의 형식으로 현시한다.

    들뢰즈의 어휘를 빌리자면, 무진형제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전시한다.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행위와 반응의 연쇄로, 즉 인과율의 공간으로 환원한다면, 시간-이미지는 그 연쇄를 멈추고 시간 자체를 직접 가시화한다. 전자가 목적론적 세계, 다시 말해서 다음 행위를 향해 내달리는 세계를 구성한다면, 후자는 그 목적론이 정지된 자리에서 시간의 순수한 형식을 드러낸다. 〈긍지의 날〉에서 하나의 운동 이미지는 무한한 시간으로 팽창한다. 행위는 완결되지 않거나, 완결된 뒤에도 다시 시작된다. 이 팽창 속에서 관객은 서사의 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대신, 현재의 두께,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지 감각하도록 초대 받는다. 무진형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흘러가는 시간을 추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흘러감 자체, 포착되기 전에 이미 사라지는 시간의 본성에 대한 응시다.

    이렇게 없는 시간, 또는 무한의 탈장소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 머리∙심장∙배꼽∙성기〉이다. "탈장소성"이라는 말은 여기서 정확한 의미를 갖는다. 장소는 좌표와 경계로 정의된다. 그러나 〈긍지의 날〉이 펼쳐 보인 팽창하는 시간, 말하자면, 공백의 반복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 머리∙심장∙배꼽∙성기 〉은 바로 이 탈장소적 시간을 신체의 언어로 번역한다. 신체를 펼쳐 놓은 이 전시는 도파민이라는 물질을 원인이 아닌 결과로 파악하게 한다. 이 전도(顚倒)는 단순한 인과관계의 역전이 아니다. 그것은 도파민 환원주의 전체에 대한 구조적 반박이다. 지배적인 서사에서 도파민은 원인이다. 욕망의 원인, 쾌락의 원인, 중독의 원인. 신경화학적 물질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설명하는 제1원리로 등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시가 "하이프"라고 부르는 과장된 환원의 구조다. 그러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 머리∙심장∙배꼽∙성기〉은 묻는다. 도파민이 욕망을 만드는가, 아니면 욕망이 이미 있는 자리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가.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바꾸는 순간, 신체는 더 이상 신경화학의 수동적 기질이 아니라, 세계와 맺는 접촉 속에서 스스로를 조율하는 능동적 감응의 장(場)이 된다.

    도파민과 욕망이라는 물질과 추상 사이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 머리∙심장∙배꼽∙성기〉은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 “사이”가 핵심이다. 도파민은 물질이고 욕망은 추상이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분류해왔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연속적이다. 욕망은 무언가를 갖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접속하려는 신체의 근본적인 경향에서 비롯된다. 도파민은 이 경향의 물질적 흔적이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 머리∙심장∙배꼽∙성기〉이 신체를 펼쳐 놓는 것은, 따라서 해부학적 전시가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이다. 신체는 도파민의 용기(容器)가 아니다. 신체는 세계와 욕망 사이의 살아 있는 계면(界面)이며, 도파민은 그 계면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지표다. 

    이런 흐름을 따라, 〈도파민 하이프〉의 시작이자 끝은 정소영-장재선의 협업 〈We Predict into Existence〉이다. 제목 자체가 하나의 테제다. 존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측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선언은 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물음, 말하자면, 현실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이 살아 있는 몸을 기반으로 한다”는 관점을 반영한 이 작업은 미래를 현재로 끌고 오려는 시도다. 그러나 미래는 정의상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오직 기대의 형식으로만 현재 안에 존재할 수 있다. 기대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우리는 다음 순간을 알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예측하고, 그 예측 위에 행동을 건다. 〈We Predict into Existence〉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간극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기대와 현재의 확실한 경험 사이에 놓인 차이. 작품은 이 차이가 단순한 인식론적 결핍이 아니라 쾌감의 원천임을 주장한다. 예측이 경험과 일치하거나 어긋날 때, 그 수렴과 편차의 순간에 도파민이 분비된다. 달리 말하면, 도파민은 확실성의 산물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해소 또는 위반이 만들어내는 사건이다.

    여기서 전시의 핵심적인 역전이 완성된다. 도파민은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예측하는 신체가 세계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결과다. 그리고 이 예측과 경험을 통한 보상의 반복 과정, 이 끝없는 순환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예측하고 경험하고 수정하는 과정의 다른 이름이다. 이 통찰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패턴을 학습하며 다음 출력을 예측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형성 과정은, 구조적으로 이 신체적 리듬과 닮아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 바깥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예측하고 갱신하는 방식을 수리적으로 추상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인간 신체의 리듬에 대한 복제이고, 인간과 기계는 이 공유된 예측의 구조 위에서 비로소 연결 가능해진다. 

    〈도파민 하이프〉가 이 모든 작품들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결국 여기다.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작동하는 영구 기관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시간 속에서 욕망하고 반복하고 애도하고 예측한다는 사실이다. 도파민은 그 과정의 지표일 뿐, 과정 자체가 아니다. 전시는 이 지표를 원인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결과의 자리에 돌려놓음으로써, 우리가 “정상과학”이라 믿어온 패러다임의 표면에 균열을 낸다. 그 균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경화학으로 포착할 수 없는 신체의 두께, 다시 말해서 예측하는 몸, 반복하는 몸, 세계와 접속하면서 스스로를 갱신하는 몸이다. 〈We Predict into Existence〉가 전시의 시작이자 끝인 이유는 이것이다. 그것은 전시 전체가 제기한 물음, 우리는 무엇으로 환원되는가에 대해, 환원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의 이름을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