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극에 눌리지 않는 소리로 빚은 극

글쓴이 소개
박종현

전통음악 평론가, 음악인류학 연구자, 대중음악 창작·연행자이다. 제11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창작자로서 독집 음반("생각의 여름")이 "EBS SPACE 공감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 선정되었다. 국민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내용
    수림뉴웨이브 2026 정상희 <엇:박> 평론

    어둠 속 쨍한 정주 소리 사이로 소리꾼이 상여소리와 더불어 걷는다. 고단한 생을 마친 놀보가 다음 삶으로 가는 과정이다. 내생 초입에서, 놀보는 환생하게 될 세상 속 여러 가족을 들여다보며 그중 어디가 태어나기 좋을지를 살핀다. 가족마다 모습이 제각각이기에, 장단 역시 묘사되는 가족이 달라질 때마다 잦은 진양으로, 중중모리로, 또 자진모리로 형상을 바꾼다. 유복한 집에서 나게 된 놀보는 중모리 위에서 중모리처럼 또각또각 살아가지만, 장남으로서의 고충 그리고 또다시 동생으로 만난 흥보의 속썩임은 그를 엇모리로 비틀대게 한다. 화가 터진 그는 휘모리의 상태로 닿아, 전생에서 그랬듯 동생에 갈()을 하고 만다. 뒤이어, 박 앞에 놀보가 서 있다. 박이 열릴 때마다 무너지는, 전생의, 이생의, 혹은 모든 곳의 놀보가 망연하다.

    <수림뉴웨이브 2026> 시리즈 첫 공연의 주인공인 소리꾼 정상희가 고수 이상화와 함께 무대로 가지고 올라온 음악적 유산은 동초제 흥보가. 판 위에서 광대는 내내 놀보라는 인물을 논다. 전반부는 새로 쓴 소리다. 놀보와 흥보가 내생에서도 형제로 살게 되었다는 설정 속, 놀보가 참다 참다 또 심술궂어진 나름의 내력을 읊어갔다. 이어 동초제 흥보가의 백미 중 하나인 놀보 박타는 대목이 후반부를 이루었는데, 소리꾼은 이를 송만갑·김연수 명창과 같은 스승의 스승들이 옛 음반에 남기었던 형태로 꺼내어 불렀다. ‘엇나가는사람의 마음을 (흔히 불균질한, 불안정한 상황 혹은 내면 상태와 연결되곤 하는) ‘엇모리장단과 정서로 그리는 앞부분의 새 창작과, 원전의 주제가 집약되는 을 노래한 뒷부분의 전통 소리대목들이 만나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구조는 <:>이라는 제목으로 표현되었다. (‘은 이번 수림뉴웨이브의 표제이기도 하다.)

    전통적 소리 및 이야기 텍스트를 재료로 혹은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새 사설을 짓고, 그 안에서 전통 소리대목 및 그 요소들을 활용하며 새로운 덩어리를 완성하는 모습은 새롭지 않다. 20세기 후반 이후 정착된, 판소리 기반 쓰기의 기본적·전형적 방식 중 하나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창작 판소리, 창극, 마당놀이, 판소리 뮤지컬, 소리극 등등의 표현을 단 연행 영역들에서 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날의 공연은 지금껏 접하여온 많은 판소리 기반 창작 작업과는 다른 종류의 경험과 감흥으로 평자에게 다가왔다. 적어도 하나의 이유는, <:>의 소리들이 일반적인 판소리 기반 음악극의 양식화된 극성(劇性)에 복무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느껴졌다는 것에 있다.

    서구적 극장 및 연행 형태와의 만남, 문화유산이라는 체제, 학생 사회 및 민중문화운동 등의 조건들 속에서 20세기 판소리 기반의 음악극은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대부분 서구 희곡의 플롯 기법, 그리고 소리에 선행하는 음악 외적 메시지라는 두 상호 연결된 지향을 추구하고 또 보여주는 일이 대부분이다. 다양한 거리의 소리판들에서부터 공식 전통 지원체계를 통해 나온 대규모 작품들까지, 2000년대 이후 평자가 경험한 많은 작업은 서구식 극작법의 고전 플롯 안에서 혹은 그를 의식하며 만들어졌다. 작가/연출가가 소리꾼()과 분리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작가주의적극작-연출이 사회적 주장이나 보편·당위적 교훈과 같은 할 말을 준비하고, 그 할 말들이 상황의 점층과 해소로 수렴되는 (협의의) 서사극으로 적힌 뒤 필요에 따라 판소리 전통에 누적된 음악 내적 기법들을 입게는 이러한 작업 방식이 잘못되었다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방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며, 그러한 방식의 소리화된 극/소리를 쓰는 극들이 보이는 일련의 경향들-예컨대 상황 설정을 위한 과도한 초입의 그리고 막간의 아니리(혹은 두꺼워지는 팸플릿), 플롯 속 부분의 기능에 맞춰 특정 위치에서 특정 상태·정서에 대응해 드러나는 장단의 정형적 활용과 그 전시, 그것을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혹은 비전통적”) 정서들을 표현키 위한 여타 음악 요소들의 기능적 틈입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은 그에 아예 속하지 않은 작품인가, 라고 묻는다면 물론 아니다. 인간에 대하여 하고픈 어떤 이야기가 소리꾼 내부의 작가-연출자에게 당연히 있다. 연행자는 그것을 시간의 흐름에 입각한 시퀀스를 통해 무대 위에서 드러낸다.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을 전달하려 아니리를 군데군데 길게 쓰기도 했다(대부분은 줄여도 무방하였을 듯싶다). 그렇지만 <:>은 극작가가 준비해 놓은 이야기의 선적 결말/결론으로 가기 위해 만들어진 작업으로 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 덩어리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놀보 심술도 사정이 있었겠지라는 전반부의 테마는 어떤 사건의 귀결이나 해소로 강요하듯 이행하지 않는다. 작가-연출자-소리꾼이 무대에서 한 것은 할 말을 반영하거나 그것이 집약될 서사의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놀보로 있으며 그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놀보의 환생과 삶의 고충, 엇나감이라는 대목들은 그러니까 상호 의존적으로 기능하는 장면으로서 서사에 완전히 예속되기보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관객에게 건네고 또 같이 놀 수 있는 다소간 독립적인, 한 음반 속 이웃한 트랙들과 같이 들리고 보였다.

    연행의 후반부를 이룬 전통 소리대목을 전반부 내용의 시간적 다음이나 이전에 놓는다든가 혹은 플롯의 특정 위치에 삽입하여 기능적으로 복무하도록 하지 않고, 일종의 상호텍스트적 병치로서 의미를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도 <:>은 차이를 보인다. 옛 소리대목이나 구절 일부 혹은 전부를 새 소리 안에서 혹은 근처에다 끌어오는 일은 너무나 흔하지만, 보통은 그 대목들을 새 소리의 서사와 그 뒤 메시지에 활용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목적을 향하였다면, 정상희 역시 놀보 박타는 대목이 아닌 다른 부분을 선택하거나, 같은 대목을 다른 위치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평자는 이 작품 전체를, 고전적 작법을 쓴 희곡의 연행적 발현으로 느끼고 말았을 듯하다. 놀보 나름의 사정을 들여다보는 전반부와 준엄한 인과응보에 관한 후반부의 소리는 설정의 측면에서 외려 여러모로 어긋난다. 둘 중 하나를 수정하여 내적 완결성을 이루도록 하거나 긴 설명을 통해 둘 사이의 관계성을 해명하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러한 플롯-하기를 취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두 부분이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을 이루며 나란히 서로 대화하게 되었고, 또 극작가-소리꾼이 아니라 소리꾼-놀보가 관객과 대화하고 궁리하는 방식의 연행 텍스트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하여, 새로 쓴 소리의 풍경 속에 전통 흥보가의 사설들을 얹어 새로운 의미와 미적 쾌감을 빚는 몇몇 순간들이 있었다. 예컨대 전통 흥보가 초입 놀보 심술 대목에서 자진모리로 주워섬겨지는 온갖 심술들이 창작 사설 속 놀보의 엇모리 위에 얹혀 새로운 맥락으로 혹은 재해석이 가능한 사연으로 화할 때, 또 원 소리에서 흥보가 밥을 던져 받아먹는 환희의 순간이 다음 생 놀보의 시선 속에서 흥보의 밉상스러움으로 드러날 때, 판소리를 사랑하여 온 청자들은 두 텍스트 사이에서 (‘극적말고) ‘음악적의미-놀이를 하는 소리꾼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이 역시, 플롯을 위해 장단의 기능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장단을 갖고 이야기를 노는 행위가 관객에게 건네어지는 것이다.

    이날의 사회자 천재현은 정상희의 창작 소리에 대한 접근을 소개하며, “마치 그냥 옛날에 이런 소리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의것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보는 이가 (완창이 부각되기 이전 시절의) ‘소리꾼인 느낌, 그러니까 이야기의 주인 혹은 그것의 재현자로서 무대를 맺는 사람이 아니라 판을 열고그 안에서 휘적휘적 사는 사람을 보는 느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의 말을 나름대로 생각하여 본다. ‘()이 있되 소리() 이전에 있는 게 아닌소리극, ‘글을 쓰고 소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언어를 포함한 소리를 쓰는 극으로서의 소리극은 어떻게 혹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소리꾼 정상희와 단짝 이상화가 앞으로도 이러한 시도를 즐거이, 더 거침없이 관객들에 건네주기를 소망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