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영과 그림자의 세계
: 수림뉴웨이브 2026 - 이준의 <Golden Hour>
어긋남, 엇나감, 엇모리, 엇박, 엇비슷….
‘엇’이라는 한 음절이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을 되뇌다 보면 이 말들이 보이지 않는 중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엇박을 타기 위해서는 정박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익숙한 흐름을 비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흐름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 경계를 오갈 수 있는 이들만이 ‘엇’을 ‘엇’으로서 들려줄 수 있는 것이겠다.
‘엇’을 화두로 내건 수림뉴웨이브 2026의 두 번째 무대는 가야금 연주자 이준의 공연이었다. 제목은 해 질 무렵 빛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시간을 뜻하는 ‘Golden Hour’. 낮과 밤의 경계이기도 한 이 시간을 제목으로 삼은 공연은 “삶과 죽음, 현실과 영의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를 바라보는 무대로 소개됐다. 〈영의 세계〉, 〈찰나〉, 〈차오르고 흩어지는〉, 〈Golden Hour〉라는 곡명들에도 분명 그 경계의 감각이 배어 있었다.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놓인 것들, 곧 상태가 변화할 것만 같은 순간, 선을 넘을 듯 말 듯 찰랑이는 것들. 이 제목들이 주는 감각은,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공연은 그 말들의 세계로부터 슬며시 엇나가고, 그건 이날 이준의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산조에서는 연주 그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대하는 연주자의 마음을 함께 상상해보게 된다. 그가 산조를 어떤 세계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연주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공연의 첫 곡인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에 이준은 ‘영의 세계’라는 제목을 붙였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겨냥하는 제목에 뒤따라, 나는 전면에 드러나는 소리보다 그림자처럼 이어지는 소리에, 사라지기 직전의 소리에, 그 소리들이 조금씩 쌓여 만드는 보이지 않는 흐름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이날의 음향은 잔향을 넉넉히 잡은, 촉촉하고 긴 소리여서 뜯는 소리와 울리는 소리 사이의 낙폭이 크지 않았다. 현을 뜯는 소리와 남은 울림은 경계 없이 하나로 이어지고 두둥실 커지며 공간을 채웠다. 그 안에서는 줄을 누르고 떠는 소리, 밀어 올리는 소리들이 유난히도 또렷이 들렸다. 가야금 연주에서 늘 듣는 소리들이지만, 새삼 이준의 연주에서 그 울림이 다뤄지는 방식이 더없이 섬세하다고 느꼈다. 그건 어쩐지, 이준이 그렇게 세심히 소리를 ‘내고 있다’는 쪽보다는 자기 소리를 촘촘히 ‘듣고 있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영의 세계’라는 말은 스승 지성자 명인의 표현으로, 이준은 현실 너머의 세계와 소통하는 음악에 가닿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산조에 그 제목을 붙였다. 이어 그는 산조의 ‘산’을 흔히 풀이되는 ‘흩을 산’ 대신, 시고 애절한 가락이자 삶이 담긴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실 산’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다르게 명명하는 그의 방식을 따라, ‘영의 세계’도 조금 달리 읽어 본다. 하나는 그림자 영(影)이다. 뒤따르는 울림을 첫 소리만큼 아름답게 조형하는 연주는 그림자가 본체만큼이나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영점(零點)의 ‘영’이다. 공연 전체는 경계의 감각을 다룬다고 하지만 이준의 첫 연주는 가장 정확한 중심에 다다르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요하다 싶을 만큼, 그는 어느 음 하나 뭉뚱그려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가장 엄밀하게 영점을 맞춘 이후에야 어딘가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듯이.
중심을 가다듬고, 손과 귀를 한껏 예민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던 첫 곡을 지나, 이어진 〈찰나〉에서 그는 사뭇 유연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장구의 황민왕과 콘트라베이스의 이원술이 함께한 이 곡은 단가 〈사철가〉의 한 구절, ‘사람의 삶은 돌을 부딪쳐 일어나는 불꽃처럼 한 순간’이라는 문장(인수순약 격석화)에서 출발했다. 곡은 말 그대로 찰나 같은 짧은 음들로 시작했지만 곧 베이스가 묵직한 흐름을, 장구가 장단으로 주기를 만들고 가야금은 그 위에서 자유롭게 떠다녔다. 그렇게 들려오는 가야금의 작은 단편들에서는 방금 들은 산조의 잔상이 언뜻언뜻 비치기도 했다. 연주자들은 짧은 구절을 거듭 반복하면서 조금씩 비틀어 보는 일, 그 미세한 변화를 가지고 노는 일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또 끊임없이 순환하는 계절을 연상하게 되는, 이중의 시간감을 지닌 곡이었다.
또렷하고 땅땅한 가야금 소리를 한참 듣다가 만난 〈차오르고 흩어지는〉은 저음 가야금과 콘트라베이스의 음색을 뭉근하게 즐길 수 있는 곡이었다. 두 악기가 같은 리듬으로, 낮게 현을 퉁기며 시작된 음악은 느릿하게 두 개의 선으로 갈라졌다. 서로 다른 리듬과 음으로 어긋나던 선들이 어느 순간 다시 한데 모이고, 다시 엇나가다가 맞물리기를 반복하는 간명한 구조였다. 가야금과 베이스는 역할을 주고받듯 서로가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위에서 놀기를 서로 반복했다. 아래에서부터 차올라 곡의 중반 이후, 무대 위쪽까지 번져 가던 푸른 조명도 그 음악과 한 호흡을 이루고 있었다.
이날의 공연 제목이자 수림뉴웨이브 신작으로 만들어진 〈Golden Hour〉는 그가 바라본 풍경을 꾸밈 없이 포착하는 듯한 곡이었다. 매일 같이 뜨고 지는 해가 만들어주는 ‘골든 아워’를 오랜만에 눈여겨보면서, 그는 아주 단순한 사실들의 아름다움을 느낀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낮과 밤이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렇게 느리게 빛이 변하는 과정이 항상 반복된다는 것. 다른 리듬으로 세상을 관찰하기만 해도 멋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관찰로부터 시작한 곡이어서인지, 들려오는 소리 또한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손이 가는 길에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것 같았던 가야금 소리, 함께 걷는 것 같았던 베이스의 낮은 울림, 때론 음향을 만들어주고, 때론 탄력적인 리듬을 만들어주던 장구의 소리가 가뿐하게 어우러졌다. 선을 타고 노는 듯한 세 사람의 호흡에서 희미하게나마 블루스의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소리난 결과가 아니라 무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날의 사회자 계명국은 이준을 전통과 컨템포러리 사이에서 무언가를 정말 잘 해내는 연주자라고 표현했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말의 위치를 바꾸어보고 싶기도 했다. 무대 위의 그를 보는 내내, 사이 혹은 경계에 있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에게 꼭 맞는 중심을 만들어가려 한다는 인상이 조금은 더 강렬하게 다가와서다.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의 손과 귀를 기준점 삼아 이렇게 저렇게 소리를 굴려가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일. 곡들은 모두 가야금을 연주하는 손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처럼 들렸다. 12현 가야금을 고집한다는 그에게는 무언가를 새로 더하는 일보다 악기가 본래 지닌 충분한 멋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요한 듯했다. 무대를 지켜보며, 이 악기의 멋은 가장 기본이 되는 소리들을 정확하게 울리는 데서 오고, 그 안에서 전통의 무언가도 컨템포러리의 무언가도 자연스레 발생한다고 여겨졌다. 무대에서 일관되게 느껴진 특유의 자연스러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 악기로, 이 연주로 충분한 멋이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으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향하며 쏟아내는 빛은 동시에 길고 부드러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해가 낮게 깔릴수록 그림자는 멀리 멀리 뻗어가지만, 그건 언제나 몸이 딛고 선 자리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본래의 몸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공연은 언제나 그 현실의 무대에서 보여주고 들려준 것을 넘어서는, 상상의 장면을 내게 함께 건네준다. 그리고 이준의 이 공연이 보여주지 않았지만 내게 분명히 남겨둔 상상의 장면 속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중심으로부터 쏟아져나오는 풍요로운 빛과 하나의 악기, 그리고 그 본래의 형상을 잃지 않은 채 아름답게 뻗어 나가는 그림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