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완벽이라는 가면 너머, 틈새에서 번지는 자아

글쓴이 소개
구수정

공연예술평론가, 음악학연구자, 음악치료사. 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
  • 내용
    완벽이라는 가면 너머, 틈새에서 번지는 자아
    : 수림뉴웨이브 2026 - 정은혜의 〈Eot-Pulse〉

    예술가의 삶은 혹독하다. 차디찬 연습실에서, 작업실에서 하루의 반을 보내며 끝이 어딘지 모를 예술세계를 파고든다. 예술가의 생계는 연습실에 박혀 있는다고 해결해주지 않는다. 초기 유입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뒤에 세상은 네가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다. 자신을 해석하고 승화하여 작품을 만드는 방식은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유물과 같은 지난 예술을 건넬 뿐이다.

    수림뉴웨이브는 이런 예술가의 시간을 기댈 수 있게 한다. 2017년부터 시작된 수림뉴웨이브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2026년 ‘엇’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한 열 명의 국악 분야 예술가를 만난다. 소리꾼 정은혜는 그 여정의 네 번째 날 9월 17일 김희수 아트센터에서 〈Eot - Pulse〉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섰다. 〈Eot - Pulse〉는 판소리의 ‘엇부침’을 가져왔다. 정은혜가 말하는 ‘엇’은 단순히 박자의 어긋남을 넘어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첫 번째 곡은 정정렬제 춘향가 어사출두 대목을 선보였다. 이도령이 “금준미주는 천인혈이라”를 부르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는 변사또를 풍자하고, 남원 관아에 어사출두하여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는 장면까지 춘향가에서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첫 곡으로 전통판소리를 선택하면서 기세등등한 소리로 공연장을 휘어잡은 정은혜는 마치 수를 내다보는 전략가 같았다.

    정은혜는 목구성이 탄탄하고 전달력이 뛰어난 소리꾼으로 알려졌다. 소리꾼이라는 페르소나[가면]는 정은혜에게 아주 밀착되어 있다. 인터뷰에서 판소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도 관찰된다.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 자신의 온 에너지를 연습과 독공에 쏟기 때문에 페르소나는 자동적으로 씌워진다. 위험하다. 자신의 얼굴을 감추면 감출수록 관객은 진짜가 무엇인지 의심한다. 무대의 완벽을 추구하면서 페르소나는 강해지고 내가 사라지면서 음악 기술력에 천착한다. 그러나 틈새를 갈라 자신의 세계를 보다 확장하면 소리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진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말하는 7년간의 소리를 못했던 시간은 정은혜의 틈새를 만들어 준 듯하다. 틈새에 대한 활력이 창작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두 번째 곡 ‘그 물에서’는 심청가 중 인당수 빠지는 대목, 세번째 곡 ‘불허’는 적벽가 일부를 가져와 만들었다. 비브라폰의 연주가 먹먹하고도 신비로운 소리로 무대를 바닷속 세상으로 옮겨 놓는다. 물을 매개로 엮어낸 작품의 흐름 속에서 그가 추구하는 음악적 이상향이 발현된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흡수하였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소리를 연결하고 분해한다. 사뭇 진지하면서도 정면돌파하는 그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그럼에도 나아가려는 의지가 그의 소리에 투영되고 있다.

    소리꾼의 다양한 면모에서 음악가로서의 소리꾼인가, 이야기꾼으로서 소리꾼인가를 굳이 따진다면 음악가로서의 소리꾼에 가깝게 느껴진다. 성음이 곧고 단단하면서도 음악적인 테크닉이 명확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춘향가·심청가·적벽가가 이야기로 전달되기보다 음악적으로 얼마나 잘 구현하는가가 더 선명하다. 음악가와 이야기꾼 사이에서의 가치판단은 불필요하다. 정은혜가 표출하고 있는 소리의 에너지는 음악가에 가깝다. 연극부터 창극, 밴드 활동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은혜를 가장 돋보이는 만드는 자리는 음악가이다. 수림뉴웨이브의 무대에서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것이 정은혜가 소리꾼으로서 가진 강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은 정은혜가 구현하는 음의 질서를 보다 귀기울이게 되면서 그의 음악에 매료된다. 추임새를 넣어 그의 집중력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은혜의 욕망은 창작자에 더 닿아 있는 듯하다. 뉴웨이브에서 처음 선보이는 곡[NEWWAVE Original]에 다섯 곡 중 네 곡으로 창작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고된 창작자의 길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음악가는 청각적인 표현력이 적확하고도 정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창작자는 음악가처럼 매끄럽지는 않더라도 거칠게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은혜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가? 세상을 향해, 또는 앞에 앉은 관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주는가? 공연이 끝난 뒤 어떠한 잔상을 남기는가. 이러한 점에서 그의 무대는 아직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음악적인 테크닉보다는 서정성에 포커싱을 둔 네번째 곡 ‘무무: 무언가’와 다섯번째 곡 ‘Eot - Pulse’에서 설익은 모습이 눈에 띈다.

    ‘무무: 무언가’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무무〉를 1인 소리극화 한 것이다. 베이스기타와 타악기 등이 함께 소리를 돕는다. 악기의 선택과 묘사는 제법 폼을 갖추었지만 텍스트를 좀 더 소릿결에 맞게 각색을 했다면 어땠을까. 엇모리의 상투적인 선율이 집중력을 떨어트린다. 어떤 장면은 노래가 어울릴법 한데 낭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특히 게라심이 무무의 목에 줄을 걸어 던지는 장면은 긴장도가 떨어졌는데, 관객의 감정선을 고려해서 끌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단편소설을 판소리로 옮겼을 때의 장점이 있을 터인데 그냥 소설을 읽는 것이 더 몰입된다면 방법을 조금 바꿀 필요도 있다. 고전이란 세대를 넘어서는 메시지가 있는 법이다. 게라심이 마지막에 무무를 물속에 던져버린 선택은 지금에도 유효할까. 소재의 선택이나 음악 창작의 방식에서는 선배 창작자인 이자람을 떠올리는 부분도 있다. 아직 맞지 않는 옷을 여러 번 갈아입은 느낌이다.

    ‘Eot - Pulse’는 인터뷰에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인터뷰를 듣고 나서야 음악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아쉽다. 이런 설명 없이도 감흥을 줄 수 있는 음악을 정은혜에게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인터뷰를 듣고보니 오히려 소리꾼이라는 페르소나 뒤에 정은혜라는 사람에게 틈틈히 더 많은 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곡 사이 관객들에게 콧물이 나 휴지 좀 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덩달아 긴장된 관객과의 틈새가 생긴다. (어찌나 견고한 벽이었던지 아니리로 “휴지 달라”는 대사를 친 줄 알았다.) 완벽한 예술가에게 틈새는 ‘부족함’이라기 보다 관객에게 침투할 수 있는 ‘인간미’에 가깝다. 앞으로 음악에서도 인간 정은혜의 틈새를 감추기보다 자연스레 발현되면 매력적인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아이디어를 포착하는 능력은 창작자에게 핵심 포인트가 될 수 있는데 그에게서 이런 가능성이 포착된다. 아이디어에서 더 확장시켜 내 질문을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까지가 창작자의 영역인데, 수많은 예술가들이 여기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수림뉴웨이브는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장이다. 상상한 것을 무대에 올려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시도해보고, 뒤엎고, 올려보고 다시 뒤엎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 정은혜의 〈Eot - Pulse〉은 지난한 과정 중 하나이다. 점들이 모여 정은혜라는 예술가의 일면이 될 것이다. 수림뉴웨이브의 관객은 다정한 동행자이자 지지자이다. 필자 역시 그의 여정에 따스한 지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