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도 대나무도 아닌, 최태영의 소리
줄도 대나무도 아닌, 최태영의 소리
: 수림뉴웨이브 2026 - 최태영의 〈비사비죽〉
비사비죽(非絲非竹)은 현악기나 관악기로도 속하지 않는 해금을 수식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시사시죽(是絲是竹)이 있다. 해금은 활로 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인 동시에 작은 대나무 울림통을 울려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최태영이 시사시죽이 아닌 비사비죽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현과 관의 분류를 횡단하는 해금이 가진 악기로의 가능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본다.
최태영은 반주자로 활발하게 활동해 온 연주자이다. 공연 후 인터뷰에서 그는 반주의 위치에서 하는 음악이 편안하며 성향에도 잘 맞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음악에도 반영되는 듯하다. 그의 성음은 다른 남성 해금 연주자와는 사뭇 다르다. 강한 힘으로 현을 마찰시키지 않는다. 그의 해금은 부드럽고 섬세한 소리를 내며 음량의 변화 폭도 크지 않다. 그러면서도 해금이 낼 수 있는 빠른 가락의 시김새를 정확하게 구사한다. 이는 그가 민요나 창극과 같은 성악 반주를 하며 쌓인 내공으로 보인다. 해금은 연주자의 기량에 따라 청자의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는 악기인데, 최태영의 해금 연주는 오래 들을 수 있을 만큼 부담스럽지 않은 귀에 감기는 소리이다. 탄탄한 기량을 가졌음에도 늘 반주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무대 중앙에 섰을 때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공연 프로그램은 단출하면서도 꽉 차 있었다. 첫 순서로는 ‘엇가락’이라 이름 붙인 <한범수류 해금산조>를 연주했다. 이는 기존 악보로 전승되던 가락이 아닌, 한범수 명인이 1968년경 녹음한 음원을 바탕으로 복원한 연주였다. 최태영의 연주를 들으며 왜 이 음악을 골랐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섬세하고 유려한 성음을 뽐낼 수 있는 가락들이었기 때문이다. 여타의 해금 산조들이 가진 힘차게 뻗고 틈 없는 호흡으로 회수하는 가락과 달리, 이 산조는 적당한 여백 속에서 전하고 싶은 말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해금으로 낼 수 있는 특유의 경(京)제 가락이 돋보였고, 이는 최태영이 추구하는 연주 기법과 잘 어울렸다. 소박한 밥상에 정갈하게 올려진 반찬을 꼭꼭 씹어 음미하는 듯한 연주는 관객의 집중을 유도하기 충분했다.
다음은 <지영희제 해금 시나위>로 이어졌다. 반주로 장구에 황민왕, 가야금에는 이준이 함께 했다. 이 음악은 1968년 지영희 명인이 직접 녹음한 음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무장단에서 중모리 – 도살풀이 – 자진굿거리 -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장단 흐름 속에서 세 명의 연주자가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가야금 연주자가 징과 꽹과리를 함께 연주하며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가야금과 해금이 병주하는 대목이 귀에 남았다. 가야금은 계면조로 들렸으나 해금은 그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듯했다. 두 악기가 서로 다른 선법을 연주한 것인지, 같은 선법 안에서 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두 선율이 만나는 접점을 찾기 어려워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못내 아쉬웠다. 이것이 즉흥이었는지, 미리 합의한 연주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어긋남을 시나위의 전략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선율이 어떤 음을 어느 자리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지속음을 내는 해금과 음을 뜯어내는 가야금의 소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세심하게 구성한다면 의외의 선율을 들려줄 수도 있겠다.
이날 시나위에서 이준과 황민왕은 각자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최태영의 섬세한 성음과 두 연주자의 적극적인 표현 사이에서 에너지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차이가 음악의 긴장으로 이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고조되거나 잦아드는 시점이 맞물리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서로 다른 성향이 만났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음악을 기대한 만큼, 그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더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공연의 제목인 〈비사비죽(非絲非竹)〉을 연주했다. 새롭게 만든 곡이면서도 선율은 낯설지 않았다. 황민왕이 회심곡 말미의 축원을 부르기도 하고, 당악을 떠올리게 하는 주제 선율을 바탕으로 한판의 연주가 이어졌다. 최태영은 산조나 시나위를 연주할 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공연의 말미라 긴장이 다소 풀어진 것도 있겠으나, 명인들의 가락을 재구성한 앞선 두 곡보다 자신에게 체화된 가락을 꺼내어 연주하는 듯한 모습이 더욱 편안하게 다가왔다. 편안한 만큼 그가 가진 특유의 성음도 돋보였다.
현과 관 사이를 횡단하는 해금은 다른 국악기보다 조율의 걸림이 적어 자유로운 연주가 가능하다. 실제 연주 방법이 그렇다. 손의 위치만 바꾸면 음계와 선법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간다. 특히 이러한 해금의 특성은 홀로 연주할 때 빛난다. 그런 점에서 최태영이 계속 다른 이들과 합주를 이어간 점이 아쉽기도 했다. 그가 장단도 없이 홀로 자유롭게 연주했다면 그가 가진 성음과 어느 갈래에 속할 필요 없는 해금의 비사비죽(非絲非竹)-됨이 더 잘 드러났을 것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정의는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없는, 그 무엇이 아니어도 됨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비단 악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음악가의 자리 또한 그렇다. 그간 반주자로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최태영이 더 다양한 자리에 놓였으면 좋겠다. 반주 속에서 쌓아온 경험이 새로운 자리에서 어떤 소리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해금이 그를 보다 자유로운 자리로 안내하지 않을까.
최태영이 공연에서 들려준 해금 소리는 그를 닮아있었다. 당연하다. 악기는 살아있는 물성이라서 연주자를 통해 길이 든다. 그의 말씨, 삶, 태도, 버릇 … 연주자와 동반하는 악기는 그를 닮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연주를 듣는 일은 그렇게 악기에 깃든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태영의 해금 소리를 더 듣고 싶다. 여러 목소리와 어울리며 길러온 그의 소리가 홀로 울릴 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줄도 대나무도 아닌 그 소리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연주자로서의 욕망을 말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그는 좋은 연주자로 오래 살아남고 싶다고, 그러려면 연주를 많이 해야 하니 아낌없이 불러 달라고 답했다. 이 소박하고 단순한 욕망이 그의 연주와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욕망이 달성되어서 그 무엇이 아니어도 되는 자유로운 해금 소리가 오래오래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