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이재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질주자

글쓴이 소개
공연예술평론가, 음악학연구자, 음악치료사. 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
  • 내용

    이재하,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질주자
    : 수림뉴웨이브 2026 - 이재하의 〈현금제:이중번역〉


    성공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얻어진다. 실패가 99할이면 성공은 겨우 1할이다. 단 한 번의 영광을 위해 음악 창작자들은 연습실에서, 녹음실에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벼리된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하더라도 다음 허들이 남아 있다. 관객의 마음에 닿았는가. 무대의 실연을 통해 비로소 성공과 실패, 아님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음을 알아챈다. 무대에서 내려오며 다음을 기약할지를 고민한다.
    이재하는 이미 성공과 실패 사이를 천 번쯤 널뛰듯 오간 창작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창피하지만 부끄러운 모습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이미 완벽의 허상을 깨달은 구도자처럼 그저 나아갈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쩐지 연민이 든다.

    수림뉴웨이브 2026의 주제는 ‘엇’이다. 이에 열 명의 예술가가 제 나름의 해석을 하여 무대에 올랐다. “올해 수림뉴웨이브 예술가 중에 엇모리를 사용하지 않은 단 한 명이 될 것이다”라는 그의 장담은 그의 내적 반항아 기질이 느껴지는 인터뷰다. 그 말이 틀릴지라도 ‘엇’을 되짚어 보는 말이 된다. 이재하의 ‘엇’은 ‘이중번역’이다. 그의 인터뷰를 필자가 이해하기엔 작가 미상의 전통 예술, 혹은 작곡가의 음악 세계를 연주자가 내 몸으로 번역하고[전수], 그걸 재료삼아 시대적 필터를 가용해 재번역[재창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음악의 해석(解析)을 언어로 치환하여 번역(飜譯)이란 용어로 뒤집는다. 해석은 대상을 풀어서 연구하는 것이지만, 번역은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사용된다. 번역도 의역과 직역이 있다.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할 것인가, 아니면 나라는 필터를 거칠 것인가. 아무래도 이재하의 이중번역은 ‘의역’에 가깝지 않을까. 2011년부터 시작한 자신의 독주회 리추얼 현금제와 이중번역을 엇붙여 <현금제: 이중번역>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보였다. 이재하의 필터로 벼리해 낸 음악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그가 준비한 음악은 ‘무엇’, ‘어긋’, ‘명금’ 세 곡이다. 이들은 곡의 마무리를 짓거나 끊김이 없이 연결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연주된다. 얼핏 긴 산조 한바탕 또는 갖은회상 완곡 연주를 떠올리지만 이 세 곡은 질감도 음악적 태생도 다르다. 40여분의 긴 시간 동안 연주자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고, 보는 사람마저도 긴 호흡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다. 무대 위 어지러이 펼쳐진 악보 사이로 첫 곡 ‘무엇’이 시작되었다.

    그가 선보인 음악의 재료는 민요, 동해안 굿장단인 드렁갱이와 구음, 승무의 반주로 연주되는 염불, 지영희 해금산조 등의 경기제 음악이다. 그의 바운더리에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원이라는 신분이 바탕이 된다 할 수 있는 민속악의 재료들이다. 몸 안에 익숙해진 전통음악의 유동적 음형들 사이 크리스탈 싱잉볼과 메탈로폰의 낯선 7음의 평균율이 무대 위 내던져진 악보처럼 나열되거나 엇붙었다.

    음과 음이 매끄럽게 붙는 것이 음악적 위트 또는 음악의 기술이라면, 어긋남과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엇의 의도일까. 전통에서 엇은 장단의 어긋남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적 요소를 이어 붙인 것도 엇이라 한다. 엇모리가 3소박과 2소박의 엇붙임이라면, 가곡에서 언(엇)롱은 장중한 스타일에 흥청거리는 농(弄)의 스타일을 엇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편은 엇의 엮음으로 두 가지 속도를 엇붙인 것이다. 여기에서 엇은 고유의 음악적 성격을 그대로 가져가되 엇나간 것처럼 붙이는데 이 엇붙임이 음악의 전환을 일으키기도 하고 음악적 유머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개념에서 바라보면 결과적으로 이재하의 엇은 태생이 다른 음간의 간격을 엇붙인 것 같다. 어긋나는 음간 간격 만큼이나 묘하게 성긴 음형은 사이의 틈을 타 혼란함이 더해진다.

    하지만 이 음형들을 애써 납득하려 하지 않으면 편안해진다. 이재하에게 음악은 역설적이게도 언어로 설득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스토리텔링도 없다. 연주자의 몸에서 울린 이 소리를 관객 역시 울림 그 자체로 받아 들인다. 뇌를 거쳐 나오는 음악의 언어적 발화보다는 진동으로 느껴지는 쾌감과 불쾌감 그 사이를 직관적으로 알게 한다. 이것이 청각적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 그것을 굳이 언어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

    이재하의 음악적 지향은 소리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서 나타난다. 메시지나 주제 의식보다 지금 현재의 이 감각을 증폭시키는 것에 몰두해 있다. 그의 실험은 블랙 박스의 조명이 아웃 된 상태에서 울리는 거문고의 살갱 소리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시야를 차단함으로써 소리는 선명해진다. 연주자는 손의 감각만으로 소리를 직조하고, 관객은 다른 감각을 차단한 채 오직 귀로 그 소리를 판별해 낸다.

    ‘명금’은 이재하의 거문고 산조이다. 그는 20대부터 임동식 산조를 복원하고 해체하면서 거문고 산조의 새 가락 짜기에 단련해 왔다. 산조는 이재하에게 ‘물려받은’ 음악이자 ‘번역’의 대상이다. 프로그램 설명에 의하면 기존 거문고 산조에 없는 휘모리 다스름과 진양, 중모리의 우조, 평조, 타령, 늦은 자진모리 등 새로운 가락과 장단을 구성했다. 또한 징 등의 금속 타악기를 사용했다. 직역하고 의역하는 과정 중인 현재진행형 음악이기도 하다. 수림뉴웨이브에서는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거문고 산조 선율을 엇붙였다. 이러한 엇붙임은 오역을 일으킨다. 어딘가 들어 봤음직한 그 선율이 때로는 유머가 되지만 지나치게 예측되면 진부하다. 새로움에 목마를 필요도 없지만 진부한 건 또 참을 수 없다. 계획된 즉흥이란 것이 미리 들통나면 재미없다. 마치 날 놀래키려고 문 앞에 숨은 덩치 큰 곰처럼 말이다. 산조란 죽을 때까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니 뭐 그럴 때도 있는 것이다. 오역과 직역을 무수히 반복해내면서 클리셰를 경계하는 최적의 번역이 필요하다.

    실험에 대한 실패 가능성을 내재하면서도 기꺼이 무대에 오르는 대담함을 가진 이가 바로 이재하이다. 상처를 머금으면서도 번역을 시도하는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에서도 느껴진다. 표면에 나타난 이재하의 이미지는 어느 것도 놓치지 않은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작 활동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난 인물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인생의 굴곡은 있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두 마리 토끼를 잘 잡은 것처럼 보인다. 질투는 받았을지언정 이렇게 건재한 걸 보면 민속악과 창작에 아슬한 줄타기를 관조하며 나름 즐기고 있다.

    그것보다는 길게, 오래,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함께 음악 하는 동료와의 동행을 소중하게 여기고 위와 아래를 잇는 40대 초입의 연주자로서의 책임감을 그는 말한다. 본을 보이고 싶은 그의 모습은 때론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전통 음악은 혼자만의 음악이 아니라 시간이 겹겹이 쌓인 음악이다. 꼭대기에 홀로서기 보다 위로는 오래된 스승들에게서 옆으로는 좋은 음악 동료들의 동행을 통해 걸어갈 것을 선언한다.

    음악의 번역이란 것은 바꿔 말하면 “전과는 다르게 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억겹의 무게를 견디면서 전통을 번역하며 살고 있는 자들의 숙명이다. 번역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또한 큰 용기이니 이재하의 질주를 우리는 감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힘을 보태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