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화이트스페이스 White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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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끌까끌한 표면과 지글거리는 화면에서 오래 머물기
20세기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시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는 「미래주의 선언문」(1909)에서 “달빛을 죽이자!”고 이야기하며, 달빛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산업혁명 기계의 미학과 속도, 특히 전기에서 폭발적인 힘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에게 19세기 예술가들은 서정적이고, 달빛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선호하던 사색적인 분위기는 배척당했다. 당대의 미래를 좌우할 가능성을 기술에서 찾았던 미래주의자들은 역동성과 생동감을 찬양했다. 기존 체계의 전복을 꿈꾸는 미래로의 열망은 지난 시간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했을 테다.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계의 운동성은 예술의 언어로 시각화되었고, 미래주의자들이 스스로 비판했던 일부 과거의 기법을 차용하기도 했다.
새로움보다 옛것을 선호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문화적 제스처를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것 선호 자체가] 급진적으로 새로움을 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움의 산출을 요구하는 문화적 규칙을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 옛것인지는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모든 시대에 옛것은 늘 새로 발명되어야 한다.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김남시 역, 현실문화, 2017,pp. 16-17)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 반드시 과거와 단절하는 것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는 종종 과거의 관습이 복구되고 역전되면서 만들어진다.
한 세기가 지나서 현재까지 미래주의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급진적 운동의 이념을 강조하며 전쟁과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폭력을 찬양한 점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우리를 지금보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 방향을 위한 움직임은 정녕 급격한 경사로 위에서만 가능한 생존의 전략일까? 모든 영역에서 이동과 변화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는 만큼, 우리는 시공간이 바뀌는 순간을 지각하기 어려워졌다.
가령, ‘번역’을 어떤 언어(A)가 다른 언어(A’)로 이동하는 시간이라 한다면, 번역 기술로 인해 우리가 A와 A’ 사이를 지각하기도 전해 이미 다른 언어가 도래해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 A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언어 A’로 바꾸는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번역은 시간을 종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행위다. 또한, 번역은 단순히 언어뿐 아니라, 문화, 현상, 경험, 기록, 가치, 철학 등 유무형의 다양한 존재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의미를 바꾸는 유동적인 움직임이다. 미술 언어도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일련의 번역 행위로 생산된다. 작가의 고유한 언어에서 출발한 작업은 재료로 외양을 갖추어 이미지가 된 후에도, 전시마다 달라지는 새로운 맥락에서 변주를 반복하며 다양한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미술 바깥 세계의 속도 변화에 견주어 달라진/달라질 것인가?
《화이트스페이스(White Space)》는 변화의 과정을 사유할 시간이 점차 소멸하는 시대에, 전시는 여전히 감각과 사유의 시간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매체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 스페이스(White Space)’는 일반적으로 공백을 뜻하는 단어로, 특히 그래픽 디자인에서 과잉의 반작용을 피해 시각적인 조화를 꾀하는 비어 있는 여백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 ‘화이트 스페이스’는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유예시키는 장소이자, 동시에 매끄러운 표면에서 금세 사라질 감각을 붙잡고 있는 까끌까끌한 표면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4인의 작가 김도연, 노혜리, 문이삭, 한진은 새로움과 속도에 천착하지 않되, 변주의 방법론에 기대어 자신들의 ‘기술’을 고수하면서 감각을 확장한다. 마치 번역이 다양한 문맥에서 고정적인 것을 유동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행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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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은 종종 전시장에서 며칠 밤을 새우면서 벽화를 완성할 정도로 그리기 행위에 여전히 힘을 쏟고, 화면에 재료를 안착시키기 위해 손을 부단히 움직인다. 얇은 장지에 세밀하게 그린 그의 세필화를 보면 그의 지난(한) 과정을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아직 펼쳐놓지 않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얼마나 (남아)있을지, 하물며 작가에게 서사의 완결은 과연 존재할까 궁금해진다. 김도연은 개인의 경험과 무의식에서 나온 감각적 심상을 주로 드로잉으로 연속적인 서사 형식을 만들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김도연의 세계는 매번 새로운 풍경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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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리는 이민, 가족사 등의 사적인 서사를 집단적 기억과 정서로 확장하면서 오브제, 몸, 언어를 조합하여 낯선 풍경을 만든다. 그의 설치작품은 단지 퍼포먼스에 종속된 ‘소품’(props)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퍼포먼스 또한 전시의 부대 행사로 전락하지 않는다. 두 매체가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작가의 전체 이야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마치 퍼포먼스 기록 스코어(score)처럼, 그의 설치작품은 미래/과거의 움직임을 예비/기록하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작가에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퍼포먼스는 휘발되지 않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설치작품은 부동의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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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삭은 흙을 소성하고 조형하는 과정에서 갈라지고 깨지는 것에 주목하여, 매끄러운 표면을 위해 흙의 물성을 정제하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면에 드러낸다. 손으로 재료를 빚고, 덧붙이기의 행위를 반복하며 형태를 만드는 ‘소조’의 방법론을 고수하며, 작가는 오늘날 사물의 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조각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질문하고, 이것을 다양한 조형 언어로 실험 중이다. 그는 직접 산과 강에서 채취한 흙, 물, 부유물 등의 자연물을 사용하여 인공물(작업)로 변환시킨다. 산과 강의 일부분을 실제 재료로 사용하여 그것들이 구성하고 있는 대상을 재현하되, 작가가 경험했던 그 시점과 상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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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은 작업 과정에서 떠오른 장소와 대상을 찾아가서 실제로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물고 응시하면서 체현한 감각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그의 작업은 기억의 잔상, 언어, 개념 등에서 출발하여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대상이나 휘발되는 순간, 혹은 사라지는 감각을 시각화한다. 작가의 작품명에 자주 등장하는 ‘Op.’는 ‘Opus’의 줄임말로, 클래식 음악에서 작품 번호를 매길 때 사용하는 기호이다. 주로 연작으로 동일한 제목에 번호를 붙이는 작가에게 음악은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특정 장소에서 경험한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화면 가득 느껴지는 운동성과 리듬감은 작가가 긴 시간 대상을 관찰하고 기다리며 깊숙이 응축해 놓은 집약체들이 분출되는 장면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의 작업은 구작과 신작이 섞이는 (재)배치의 행위로 존재한다. 일시적인 물질적 배열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며, 전시는 작업의 개별적 의미를 유지하되, 다른 작업과 연쇄적으로 연결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배치의 행위성은 ‘아날로그적’이라 할 수 있다. 아날로그를 단순히 디지털에 반하는 오프라인 매체로 미디어에서 오용하고 있지만, 아날로그는 본래 연속적인 신호를 지칭한다. 아날로그 방식은 자료를 물리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긴 소요 시간이 필요하고, 노이즈가 발생하기 쉬우며, 저장 및 전송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신호가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감각이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이유다.
아날로그 입자는 불규칙적이고, 입자 사이사이에 성글게 공간-‘공백’이 존재한다. 이미지 생성 AI가 아직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사람 ‘손’의 묘사라고 한다.
(《화이트스페이스》의 그래픽 디자인은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은 손가락과 얼굴을 통해 소통하고 번역하면서 생기는 여백/빈 곳을 표현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작가 양윤화의 디자인 시안 제안서 참조) 전시 포스터의 굵은 입자의 질감은 아날로그적이다.) 《화이트스페이스》는 정제되지 않아 까끌까끌하거나, 고전영화의 지글거리는 화면처럼 미끈하지 않은 자리를 제안한다. 이 경험은 관람객이 몸을 움직여 무려 74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려, 1층-지하-2층-2층 테라스-옥상까지 다 둘러본 후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