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2025년 수림뉴웨이브 '결: 예술가의 시간'
이정석 〈아로: 나를 새기는 소리〉 공연 리뷰
소리의 자리를 건네기: 수림뉴웨이브 2025, 이정석의 〈아로我露: 나를 새기는 소리〉
전통음악사 속에서 몸과 악기가 울려내는 소리의 방식은 무대 혹은 판의 형태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궁리되었다. 사랑채, 시장통, 잔치판, 풍류방 등의 공간성 대신 프로시니엄 형태의 무대-관객 관계가 연행의 조건으로 주어지면서, 성대를 포함한 악기들은 연주자 스스로의 귀나 그를 둘러싼 곁이 아니라 그에 ‘마주앉은’ 이들로 향하게 되었다. 공간 혹은 앙상블의 규모가 커져 그 마주하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 으레 마이크, 증폭기, 스피커, 믹싱 장치를 사용하여 그 소리를 새로이 매만지게도 되었다. 한편, 음량을 키워내기 위한 악기 자체 및 그 주법의 개량 역시도 이러한 새 조건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나를 새기는 소리〉라는 부제를 단 이정석의 〈수림뉴웨이브 2025〉 공연 첫머리에서, 사회자는 “거문고 연주자가 듣는 소리가 가장 좋은 소리”라는 주인공의 소신을 소개하며, 이러한 소리를 관객에 들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이어질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연행에 반영될 것이라 안내하였다. 전형적 프로시니엄의 조건에서 이러한 의도가 어떻게 관철될 수 있을까? 악기 곁에 연한 채 그에 소리를 새기는 ‘나’의 귀를, 연주자는 어떠한 방법론으로 저 건너의 관객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 공연을 통해 드러낸 그의 대답은 ‘측정·측량에 기반한 공학적 재현’이었다.
거문고와 같은 대형 지터류 악기 연행에서는 보통, 하나의 마이크를 측면이나 하단에 두어 수음한 뒤 이를 이퀄라이저 등을 통해 (대체로) 깎아내어 새 공간에 맞추어내는 믹싱의 방식이 사용된다. 시각예술로 비유하자면 풍경을 판화로 옮긴 후 음각(陰刻)하는 과정에 가까운 매만짐의 형태다. 반면, 이 공연에서 사운드 디렉터 이경환, 사운드 디자이너 김영일과의 협업을 통해 연주자가 보여준 방식은 복수(여섯 개)의 마이크를 붙여 수음한 다중의 소리 재료를 얻어내고, 이를 섞어 사전에 의도된 (연주자 곁에서 듣는 소리의) 값으로 만드는 종류의 라이브 믹싱이었다. (사실 악기 라이브 믹싱에서 ‘블렌딩(blending)’ 자체는 흔하나, 단일한 현악기 연주에서 마이크-마이크, 마이크-피에조 픽업과 같이 둘 정도까지를 섞는 것이 자연스러움과 효율성을 위해 대부분 사용되는 방식이다) 다시 비유하자면 필요에 따라 소스를 서로 붙여내는 소조(塑造), 더 나아가자면 기존 측정·계산값을 입력해 이를 구현하려는 지향이라는 의미에서 (사전 프로그래밍에 의한) 3D 프린터 작업의 라이브 버전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렇게 구현된 이날의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는 관객으로서의 평자에게 꽤나 흥미롭게 낯선, 낯설게 흥미로운 소리를 선사하였다. 악기와 술대가 만날 때마다 드러나는 울림의 양과 그 모양이 확연히 다르게 들렸다. 술대에 금의 몸을 때리고 긁는 소리 및 통이 울리는 소리가 훨씬 강조되었고 그것들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또한 터치(attack) 후 음이 줄어드는(decay) 정도가 적어지고 지속(sustain)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여음이 커져 음과 음 사이로 차올랐다. 또 왼손의 움직임이 내는 여러 소리 예컨대 농현을 탈 때 손이 줄과 괘를 삐걱이는 미세한 소리, 줄이 괘와 서로 마찰하는 소리 등을 기존의 (자연음향 및 마이크 시스템을 포함한) 전형적 무대-관객 상황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크게 (혹은 듣지 못하다가 비로소) 듣게 되었고, 이를 감상의 풍경 일부로 포함하도록 하였다. ‘멀리서’ 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곁에서의 귀’가 건네어진 셈으로, 평자에게는 20세기 이전 지금의 무대가 아닌 공간성 속에서 들었을 어떤 악기와 소리와 사람의 관계를 새삼 사유하게끔 만드는 흥미로운 시간이 되었다. 고수가 없는 독연(獨演)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거문고-음향에 대한 메시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도 생각된다.
이어 공연 후반을 채운 연주자의 창작곡은 공연 제목과 같은 이름의 〈아로: 나를 새기는 소리〉로서, 거문고에 사용되는 오동나무, 밤나무, 장미나무, 대나무라는 재료들이 1~4악장의 표제가 되어 드러난 뒤 이 모든 것의 어우러짐으로서 ‘현금’이라는 제목으로 화하는 5악장이 곡 전체를 맺는 형식의 악곡이었다. 일종의 옴니버스 형태 속에서 각 장의 표제를 이루는 물성들은 곡에 형식(주의)적으로 반영되었다기보다는 서사의 재료로 활용되었다고 여겨졌으며, 앞선 연주와 관련하여 논한 ‘소리의 자리를 새로이 건네려는’ 지향이 이 연행에서도 이어졌음이 보였다. 공연 후 대담에서 연주자는, 거문고 몸통 안에서 받아낸 소리의 측정값을 수치화한 뒤 그 값을 음향기술적 접근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음을 밝히었다. 그 결과, 앞선 곡과 관련하여 이야기된 여러 소리의 변화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수이 감지되었다. 복수의 핀마이크들을 통해 소리의 역동(dynamics)을 세밀하게 받아내고 이를 믹싱을 통해 자유로이 조절·증폭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내기의 주법 예컨대 술대로 살살 현을 건드리듯 두드리는 터치 등이 효율적인 전달을 기대하며 연주되었다. 이는 전형적 프로시니엄 형태에서는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기에 작곡의 과정에서부터 저어될 수밖에 없겠으나, 소리의 조건이 재구성되면 (혹은 과거의 ‘곁’이라는 조건이라면) 전달이 훨씬 용이해지는 종류의 주법이 되는 사례이겠다.
결국 이날의 두 연주는 ‘소리의 자리’를 연주자와 악기의 몸 안/곁(그리고 그 곁에 있었을 전통적 연행 상황에서의 감상자들)으로 되가져와 관객에게 건네어보는 덩어리로 평자에게 다가왔다. ‘자연음향 대 마이크 사용’과 같은 일차원적이고 때로 비음악적·정치적 당위에 휘둘리는 담론들이 오래 지속되어온 전통예술의 장에서, 이러한 모습은 한 차원 더 음악과 미학의 입장에서 생산적인 창작자·연행자의 시도로 즐거이 읽히었다. 다만, 공학적 측정값을 최종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외려 (의도한 바와는 달리) 연행의 공간(성)을, 혹은 악기 자체의 소리를 어떤 의미에서 소외시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비평적 물음을 하나 건네보고 싶다. 많은 소스를 받아내어 그것을 만지는 행위 자체는 그 자체로 열려 있는 연행의 일부이지만, 그 지향이 ‘사전 측정된 바람직한’ 값으로 향하게 되면, 개개 현장에 거하는, 그에 고유한 악기와 사람과 소리의 상태를 개념적으로 덮고 (앞서 ‘3D 프린터’의 비유처럼) 당위적 계획안의 결과물에 가까워짐으로써 ‘연행적 현재’를 일견 소외시키는 되는 셈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거리와 그로부터 오는 쾌를 건네고 받고 답하는 대화의 장이 연주자 이정석과 동료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소리를 내고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시도의 이야기들이 이어, 널리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